느려진 삶의 속도
제주에 온 뒤, 가장 많이 변한 건 ‘걸음’이었다.
예전엔 걷는 게 목적이었고, 그마저도 겨우 시간을 내야만 했다. 이제는 걷지 않으면 하루가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하다.
이른 아침, 창문 너머로 오렌지빛 하늘과 물든 구름이 나를 부른다.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를 타고 달린다. 10분 남짓 달려가면 해는 때맞춰 저 멀리 올라오기 시작하고 하늘은 더욱 황홀한 빛깔을 나에게 선사한다.
한 번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황홀한 순간을 알고도 어두운 집안에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걷는 동안 머릿속은 정리된다. 바쁘게 살던 그때엔 늘 다음 해야 할 일들과 집 안팎에서 챙겨야 하는 일, 살 것들로 마음이 한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제주로 내려와 걸으면서는 ‘지금 이 순간’이 자꾸 눈에 들어와 밟힌다.
그새 수면 위로 떠올라버린 해가 간지럽히듯 바닷물을 반짝이게 하는 윤슬에 감탄하고, 무심코 걷다가 만난 난생처음 보는 파랑새에 내 안의 어린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부드러운 바람결에 단단하게 잠겄던 내 마음도 모르는 척 슬쩍 흘려보낸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에서는 더 많은 걸 배우게 된다. 돌멩이 하나에도 이야기를 붙이고, 풀꽃 하나에도 이름을 붙여준다. 아이들 눈에는 걷는 것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발견하는 놀이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나뭇가지를 찾고 행복해하고 처음 보는 크기의 왕개미를 찾아내는 놀라운 그 순간. 나 역시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음을 깨닫는다.
“걷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제주에 와서야 알았다.
걷는 것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조급하디 조급했던 마음을 자연과 함께 하는 그 순간. 조금은 느려진 걸음에 맞춰 내 안에 있었던 새로운 박자를 찾아본다.
내일 새벽, 저 창문 너머로 오묘한 오렌지빛이 느껴진다면 나는 기꺼이 바다에 등 떠밀려 그곳을 걷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