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비법

희생, 헌신, 리더십

by Joung park

나는 현대의 고 (故) '왕 회장' 정주영이라는 남자를 참 좋아한다. 좀 더 정직한 표현으로 하자면 이 아산이라는 사람의 광팬이다. 어느 정도로 광팬일까? 나는 정주영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믿고 나의 세 아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에 반강제적으로 현대차를 구입하게 했었다. 제가 '왕 회장' 현대차를 고집한 이유가 있다. 걸음마 수준의 한국 브랜드 자동차에게 힘을 실어주는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는 억지 논리였다. 그래도 고맙게도 황소 같은 아버지의 고집을 끝까지 밀어 붙이자 고맙게도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들도 현대차를 타고 다녔다.


물론 '역시나'로 초기에 구입한 정주영의 자동차는 크고 작은 문제들의 돌출로 '어쩌다' '마지못해' 아버지의 압력에 굴복해 현대차를 굴리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이만저만의 고충이 아니었다. 물론 현대차를 강추한 아버지의 위신, 체면, 그리고 자존심에 상당한 금을 가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정주영의 현대차를 포기하는 것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 고집하고 막무가내로 ‘일편단심 민들레’로 다음 자동차 역시 현대 차였다.


아산 정주영의 광팬이다 보니 자연이 그의 취미와 취향에도 관심이 갔었다. 살아생전 현대의 '왕 회장'은 '정글의 법칙'이라는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저 역시 '정글의 법칙'의 열렬한 펜이 되었다. 그런데 왕 회장은 왜 ‘정글의 법칙’의 좋아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취향에서 고인의 마음의 중심을 살짝 훔쳐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왕 회장을 생각하다가 한 번은 동물의 왕국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아프리카 세렝게티 대평원에 거주하는 누우 떼 (Gnu)의 이동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그 감동과 감명이 아직도 내 뇌리에서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누우(Gnu)는 아프리카의 초식동물로 수만 마리가 떼를 지어 살아간다. 그런데 이 누우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건기(乾期)가 닥쳐오면 또 다른 풀밭 또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 대장정을 해야 한다. 이 대장정의 절정은 바로 그들 앞에 놓여있는 또 다른 강을 건너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떡하나? 그들이 넘어야 할 강의 넘실거리는 강물도 위협적이지만 강 안팎에는 천적인 악어들이 침을 흘리면서 호시탐탐 그들을 삼키려고 입을 쩍 벌리고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이다. 일개의 미물인 동물 누우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하고 마는 행동을 하고 마는 것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어디에선가 온 것인지 첫 번째 누우가 강물에 뛰어든다. 두 번째, 세 번째 누우도 강물에, 그리고 또 다른 누우가 강물에 뛰어든다. 혼자만 살려고? 아니다. 바로 입을 쩍 벌리고 단번에 누우 때들을 집어 삼킬 기세를 토하고 있는 악어들의 입을 향해 돌격 앞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었다.


곧바로 강에는 살점이 튀고 핏빛 장관이 연출된다. 그렇게 동물들의 '촌철살인 (寸鐵殺人)과 살신성인 (殺身成仁)' 의 실험의 현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냐고요? 바로 포식한 악어가 허기진 배를 다 채우고 마침내 입을 다물 때까지 말이다. 이 장면을 제가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고 턱 부족이라 복효근 시인의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을 읊을 뿐이다.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강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여러분, 강물에 뛰어드는 누우는 저에게 "당신은 살면서 도대체가 그런 희생을 한 적이 있나요?"라고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금 이만큼이나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하고 '한강의 기적'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누군가가 기꺼이 우리를 위하여 누우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단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을 뿐이지 그 옛날 그 누군가의 누우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누우는 가족 중에 있었고, 친구 중에 있었고, 또 한 번도 내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 중에 있었다. 언젠가 '왕 회장' 은 현대 신입사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제 누구보다도 안락하고 호화로운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위기 상황을 외면한 채 나 혼자만 편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국가와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고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 우리는 험악한 물속에 기꺼이 뛰어든 선배들에게 다 빚진 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과연 살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애통했는가. 아니면 ‘그러게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니’ 하며 오히려 한숨과 비아냥으로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기꺼이 타인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한 동물들이 사유하는 인간 이상으로 그토록 숭고하게 만든 그 무엇이 무엇일까? 속물들이 득실거리는 이 인간의 세상을 살면 살수록 갑자기 누우의 희생이 경건을 넘어서 불가사의 해진다. 일개의 미물인 동물들이 살신성인이라니! 갑자기 소위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을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지역의 마라강으로 한 번 수학여행을 보내면 어떨까? 그리고 필수과정으로 강가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악어 입으로 뛰어드는 누우 떼들을 보게 하면 어떨까 싶다.


이 아침에 안일함과 게으름에 빠진 나의 정신을 깨우는 큰 죽비는 단연 누우 떼들의 교훈이다. 즉 모든 위대한 사람은 다 자기만의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지방 정복에 출정했던 자기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하여 진군해오다가 루비콘 강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강은 시저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지역과 그가 월권할 수 없는 로마 사이에 있는 마지막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그 강을 건너는 순간 그는 이제 공식적으로 나라에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셈이 되는 것이었고, 만약 그 일이 실패하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성공과 실패, 생과 사가 걸려 있는 그 중차대한 기로에서 루비콘 강을 바라보던 시저는 저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말을 몰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저에게 있어서 그 루비콘 강 도하 (crossing the river)는 자기의 한 인생 전부를 가름하는 최대의 도박판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단 그 강을 건너간 순간, 그는 다시는 되돌아올 길이 없이 그저 로마를 향하여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국면,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한 장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누우떼를 보면서 언젠가 들은 말인데 가슴에 깊이 담겨 둔 잠언이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내거든요" “Sometimes it is the people no one imagines anything of who do the things that no one can imagine.”그렇다. 모든 비범과 평범함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소수들의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냈음의 덕택이다. 바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 이다. 모든 위대한 문명 (가정, 공동체, 교회, 기업체)의 뒤에는 그 단체의 소수자가 죽으면 죽으리라 악어의 입으로 뛰어들 때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2.8%의 염분같다.


지금은 모두들 가정의, 나라의, 공동체의 또 교회의 위기라고 한다. 정말이지 창조적 소수가 절실한 시대이다. 노래꾼 아산의 18번 애창곡 '선구자'의 끝부분의 가사이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1절)" 그리고 2절이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는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사 속에서 누우 떼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사명과 숙제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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