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행복 행운 오늘
유명 주간지 타임 지에서는 이번 주 칭기즈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지를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흐름을 비교적 잘 파악하는 타임 지에서 커브 스토리로 왜 하필이면 지금 이때에 칭기즈칸의 삶을 집중탐구를 할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타임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1천 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인류 역사를 바꾼 인물로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테무친)을 꼽았다.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은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었다. 그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사람은 타임지만이 아니었다.
미국 유명 경제잡지인 <포춘>에서는 그를 ‘500명의 CEO가 뽑은 밀레니엄 최고의 리더’로 뽑았다. 대 몽골제국의 칭기즈칸 그가 세상을 정복할 때 몽골의 인구라고 해봐야 고작 100만 명 정도였고, 싸울 수 있는 군사의 수는 20만 명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몇 백 배의 인구와 군사력을 가진 중국과 유럽을 무너뜨렸다는 전무후무의 업적을 이룬 영웅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특별한 ‘DNA’를 가진 인간이기에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인간 칭기즈칸이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그가 남긴 10개의 명언이 갈증 난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 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일이었다….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비로서 칭기즈칸이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이 칭기즈칸의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열병을 앓고 있나 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0개의 명언이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다.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인 '한산'에 젊은 층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또 미국에서도 최근 대학에서 칭기즈칸을 다루는 과목에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에서 궁금증이 폭발한다. 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 이순신과 칭기즈칸이라는 어떻게 보면 한물간 인물들에게 관심을 가질까? 타임즈 편집장의 말인데 참 수긍이 가길래 소개한다. "우리 모두에게 (특별히 젊은층 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칭기즈칸의 견딤과 인내의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한신’의 감독도 그렇게 말을 한 모양이다. “충무공을 통해서 요즘의 젊은이들은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장군도 그 옛날 삶의 벼랑 끝에서 혼신의 열정과 결단으로 처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비상하는 비전을 제시하기에 장군의 고군분투를 스크린으로 보면서 짜릿한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적인 치유를 맛보는 것이다.”
정말이지 '콕 집은' 충고이고 진단이다. 정말이지 지금 젊은이들은 “따를 지도자와 흔들 깃발의 부재”에서 허덕이고 있는 딱한 현실의 주인공이다. 지금 한국이나 미국이나 칭기즈칸과 이순신의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인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결혼 포기, 출산 포기, 내 집 마련 포기, 인간관계 포기, 꿈 포기, 희망 포기’ 등등의 탄식과 한탄의 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마치 이순신 그리고 칭기즈칸은 포효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수처작주 입처개진 (가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 지금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이다)"라는 말을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도 넓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것 같다. 갖은 맥락에서 미국 하버드대 박사 스티븐 코비도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에 기죽지, 주눅이 들지 말고 또 밀리지 말고 먼저 "주도적이 되라"고 한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법을 찾아내야 하며, 다른 환경에서 막연한 출구를 희망하지 말고 내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초지일관 전심전력을 다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충고이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있으면 지금보다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믿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
그런 허황된 희망고문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칼 부세의 시 ‘저 산 넘어 Over the Mountains’가 좋은 백신으로 보인다. “산(山) 너머 저 멀리 행복이 있다기에 아 남들 따라 길 나섰지만 얼굴에 눈물만 얼룩진 체 나는 되돌아왔네 그 멀리 행복이 있다는 말만 듣고 갔다가” 그렇다. ‘행복’은 저 멀리 있었던 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 이곳 here and now’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세상은 '수처작주 입처개진' 즉 ‘어딜 가나 내가 가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 지금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이다.’라는 말속에 고스란히 아우러지고 있었다.
그렇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꾸만 이곳이 아니라 저곳에서 천국을 찾아다니고 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말하는 그 ‘유토피아’ 즉 ‘천국’이라는 말의 원뜻은 그리스어로 뜻은 ‘그런 곳은 없다.’(no such place)라는 말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이리저리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쉽게 순풍에 돛 단 듯, 그저 무사태평하게 순조롭게 전진하는 돛단배는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순간이 사투였고 혈투였다. 불쌍한 인간들은 네잎클로버 “행운”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서 정작 코앞에 있는 세잎 클로버 “행복”을 짓밟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잡힐 듯 말 듯 한 ‘행운의 상징’이 갖는 힘을 지나치게 믿는 우를 범해서 오히려 오늘 행복하지 못한 길고 가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렇게 늘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고 말았으니 세잎클로버의 “행복”은 항상 찬밥 신세였고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 사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토피아’ 즉 ‘천국’이라는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해서 인간의 눈에 볼 수 있게 오는 게 아니고 바로 심중(心中)에 있다고 한다. 일맥상통하게 레오나드 월갓도 ‘바로 여기:The point is here’라는 그의 시(詩) 마지막 부분에서 “천국은 오늘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라 오늘을 새롭게 사는 것이다.”라 한다. 역사 이래 가장 현자라는 솔로몬 왕도 이렇게 외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나는 이 솔로몬의 권면을 내 나름대로 이렇게 재단을 하여 가슴에 달고 다닌다. ‘세상만사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이다.
어찌 감히 우리네의 삶들을 칭기즈칸과 이순신의 고난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새 발의 피 정도일 뿐인 것을. 그래도 나나 당신이나 나름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깬다는 ‘꽝’과 ‘결단’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지금까지 용쾌 견디고 이겨내면서 이만큼이나 살아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고 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처럼 세상과 맞짱도 뜰 수 있을 만큼 패기 넘치는 ‘객기’도 있었다. 돌아보니 다 우리 어머니 덕이었구나 싶다. 그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우리 엄마는 큰일이 닥칠 때면 항상 쩔쩔매는 아들에게 “이놈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먼저 들어가라”라고 철없었던 나이에는 ‘알쏭달쏭’하기만 했던 말씀을 하셨다.
바로 시골 아낙네의 ‘온고지신’의 삶에서 터득한 산 체험에서 온 지혜였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일자 무식꾼’ 우리 엄마의 삶의 넋두리가 그렇게 엉뚱하고 허무맹랑한 말만은 아닌 것 같다. 시골 촌 동네 아낙네의 전매특허 불호령이 21세기 최고의 ‘투자 귀재’ 워렌 버핏의 입에서도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에 먼저 뛰어들어라.” “나를 죽이지 못하는 문제는 나를 훨씬 더 강하게 할 뿐이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한마디로 ‘수처작주 입처개진' 즉 ‘어딜 가나 내가 가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 지금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이다’라는 말씀이다.
오늘에 충실하자. 그리고 그 안에서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찾도록 하자. 시를 벗 삼아서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 자리니라.......중략.....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구상 <꽃자리> 중'
이 무슨 궤변인가? 내가 앉은 자리는 근심 걱정투성이의 '가시방석'처럼 불안하고 불편한 자리인데 이 자리가 꽃자리라고 하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봐야지.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가시방석'이 '꽃자리"가 되는 최면술이라도 걸어봐야지. 어찌 알겠나 “행운”과 “행복” 둘 다 한꺼번에 거머쥐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