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세계는 다시 세워진다
아내와 시내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한시간정도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단단히 조인 일상을 느슨하게 푸는 작은 즐거움이다.
통영의 밤공기는 적당히 상쾌하면서도 희미한 꽃향기를 머금고 있어, 숨을 들이켤 때마다 통영의 깊은 속살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로등은 보도블록의 깨진 틈새마다 야윈 그림자를 드리웠고, 우리는 그 고요한 기운을 등 뒤에 업은 채 밤의 이면을 걷는 구름처럼 조용히 발을 맞추었다.
길 중간쯤, 낡은 페인트가 허물처럼 일어난 상가 건물 1층에 테이블 세 개가 전부인 작은 술집이 하나 있다.
입구의 작은 화분들이 밤이슬을 맞으며 파르르 떨고 있는 그곳은, 도심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유예된 비밀스러운 섬 같았다.
그날도 우리는 잠시동안의 목축임과 휴식을 위해 그곳에 들렀다.
가게에 들어서자 옆 테이블에는 이제 막 20대 중간 해의 계절을 통과했을 법한 두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이 세개뿐이라 아무리 듣지 않으려 해도 그녀들의 목소리는 낮은 안개처럼 우리 곁으로 스며들었다.
한 아이가 지나온 삶은 거친 모래 입자가 서걱거리는 사막 같았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의 손에 자란 아이는 교복의 포근함 대신 입어야 했던 외로움과, 학교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진 시퍼런 멍자국들이 아이의 여린 살결을 헤집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임에도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앉는 대신 네일아트와 미용을 배웠다.
아무리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매일매일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보살펴온 셈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애견미용을 배우려 애견미용실에서 일을 했고 그런 그녀에게 애견미용실 사장이 건넨 솔깃한 제안을 인생의 첫 '호의'라고 믿었다고 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기특하다며 권리금도 없이 가게를 넘겨주겠다는 그 다정한 말들.
그러나 그것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초년생의 순진함을 겨냥한 노련한 덫이었다.
가게를 맡자마자 사장은 뱀처럼 허물을 벗었다.
곪아 터진 빚더미를 떠넘긴 것도 모자라, 그에 항의하는 그녀를 도리어 은혜도 모르는 사기꾼으로 몰아세웠다.
한때 다정했던 손님들까지 사장의 혀끝에 놀아나 날카로운 화살을 보탰고, '내용증명'과 '고소'라는 생경하고 무서운 말들이 아이의 숨통을 조여왔다.
"엄마 아빠도, 내 옆엔 아무도 없는데, 다들 나만 나쁜 사람이래... 차라리 내가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은 술잔 속에서 힘없이 터지는 거품처럼 허무했지만, 그 공기 속에 퍼진 슬픔은 지독하리만큼 무거웠다. 제주도에서 친구의 절망 섞인 전화를 받고 단숨에 달려온 또 다른 아이는, 하얗게 질린 친구의 마른 손을 부서질 듯 꼭 쥐고 있었다.
결국 오지랖이 넓은 아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따뜻한 물음에 그녀들은 둑이 터진 것처럼 억울함과 눈물을 쏟아냈다.
대단한 지혜는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규칙들과 그 비겁한 수법에 맞설 작은 방패들을 차분히 정리해 주었다.
당신이 결코 잘못한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조각조각 모아 건넸을 뿐이다.
그녀는 내일 당장 해보겠다며, 젖은 눈을 닦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한 달 뒤, 다시 찾은 그 작은 술집.
늘 낯을 가리며 안주 접시만 내려놓던 젊은 사장이 웬일인지 우리 곁에 잠시 머물렀다.
"저번에 그 친구들요. 얼마 전에 다시 왔었는데, 두 분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됐대요. 혹시 오시면 꼭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요."
창밖에는 여전히 깊은 밤이 흐르고 있었고, 통영의 바닷바람은 가게의 낡은 간판을 가볍게 흔들며 지나갔다. 누군가의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정의감이 아니라,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이의 귀와 잠시 멈춰 서준 발걸음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세대의 비열함이 남긴 흉터를 덮어준 것 또한, 우연히 마주친 어느 어른의 작은 관심이었다는 역설적인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뿌듯하면서도 아릿하게 저려 왔다.
그녀의 환한 웃음이 그 술집의 노란 전구 빛 속에 잠시 머물다 간 듯했다.
우리는 남은 맥주를 천천히 비웠다.
아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독 달이 밝아 발밑의 자갈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길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들이 달빛을 가득 받아 하얗게 일렁이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적어도 그날 밤 우리 발밑의 길은 더없이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