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이라크행 비행기에 몸을 싣다.

[현장 생활과 먹거리]

by Oldies but Goodies

당시 현장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전쟁 중인 이라크의 보안 상 문제로 인해 컴퓨터를 들여올 수 없었고 무전기와 복사기까지 사전 승인 품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이라크 국적이었던 독일 감독관이 예외적으로 컴퓨터 한 대를 들여와 자신의 숙소에 설치하여 당시에는 신 문물로 여겨지던 컴퓨터를 모두가 신기해하며 구경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무전기도 사전에 이라크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민감한 물품이어서 사용 후 모든 무전기와 배터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반납 또는 폐기를 하였으며 분실 시에는 예외 없이 벌금을 내며 처리해야만 했다.


컴퓨터가 없었으니 당연히 프린터도 없었고 본사에서 회장님이나 고위 임원 분들이 오신다고 하면 A1 혹은 A0 크기의 차트판을 작성하여 지휘봉으로 페이지를 넘겨 가면서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는데 현장에서 글씨 좀 쓴다는 사람들 몇 명에게 차트판 글씨를 작성하게 하여 그중 가장 잘 쓰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곤 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도 있어서 은근히 경쟁심을 부추기는 면도 있었기에 참여하려는 직원들이 많았다. 간혹 글씨체가 엉망인 직원이 일부러 참여했다가 심사를 맡은 소장님과 공구장님들이 박장대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장 상황에 따라서는 차트사를 한국에서 데리고 간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와 가요 프로를 녹화하여 비디오테이프를 정기적으로 본사에서 보내줬는데 가장 인기가 있던 프로그램이 KBS의 ‘가요무대’였다. 모두들 넓은 휴게실에 모여 ‘가요무대’를 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가끔 눈물을 찔끔 (?) 흘리기도 했다. ‘가요무대’는 지금도 KBS에서 방송되고 있는 초 장수 프로그램이다.


신문도 보름에 한번 본사에서 보내주면 따로 개인들이 방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철끈으로 묶어서 휴게실에 비치해 놓고 보곤 했다. 휴가를 다녀올 때 잉크 냄새나는 따끈한 (?) 하루 전 신문을 가지고 오면 우선 소장님이 보신 후에야 나눠 볼 수 있던 인기 아이템이었고 주간지나 월간잡지 등도 휴가 때마다 가지고 와야 하는 필수 구매 품목이었다.


당시 이라크 내에는 맥주 공장이 있었고 길거리 주류판매소에서도 위스키 등을 팔고 있었으며 길거리 식당에서 맥주는 상관이 없었지만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불법은 아니어도 현지인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자 종이봉투에 넣어 맥주와 섞어 마시곤 했다.


이라크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우려하여 이라크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에 따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이라크에서는 술 마시는 것을 허용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지금도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양고기는 냉장시설이 없이 상온에 걸어 놓고 팔고 있었으며 요리된 케밥과 (양고기를 다져서 꼬치에 뭉쳐 붙이고 구운 음식) 티카를 (양고기를 깍둑썰기를 하여 꼬치에 끼워 구운 음식) 길거리 식당에서 사 먹곤 했는데 별 탈은 없었다. 아마도 기온이 매우 높고 습도는 낮은 기후 특성 때문에 상온에서도 보존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전쟁 중이라 냉장 시설도 갖추기 힘들었겠지만 대대로 그렇게 해왔던 생활 방식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 음식을 먹을 때면 넓적하게 구운 빵과 파, 양파 등을 곁들여 주었고 양고기를 싸 먹으면 상당히 맛이 있었다. 빵은 맛도 있었지만 가격이 저렴해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식사였다.

이라크는 당시 외부의 적과 전쟁 중이었기에 국민들의 기본적인 먹거리인 빵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저렴한 금액으로 제공을 하여 우리들이 빵만 돈을 주고 사 먹는 경우는 없었지만 빵 값은 거의 공짜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슬람 국가이므로 당연히 라마단이 있었는데 라마단 기간 중에는 술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라마단 한 달 여 전부터 이라크 산 맥주를 박스로 구매하여 숙소의 빈방 가득 차곡차곡 쌓아 보관을 했다가 라마단이 시작되면 마시기도 했다.


예산에 여유가 있던 현장이라서 직원들에게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끼지 않는 편이었는데 모든 식품은 냉장, 냉동 컨테이너로 한국에서 수입을 하였고 대구, 고등어나 오징어 그 외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생선들도 해외에서 수입을 하여 제공하였다. 특히 프랑스 등에서 육류도 수입하여 설날과 추석 등 명절에는 육회 포함 다른 특식도 먹을 수 있도록 한국인 주방장님들이 수고를 해주었다.


아울러 현장에서는 신선한 채소를 제공하고자 한국에서 농사일하시는 농부 두 분을 모셔와 배추와 무, 상추 등을 재배하였는데 그 채소들은 바그다드의 한국총영사관에도 공급이 되었고 두부공장과 간식 제공을 위한 빵공장도 캠프 내에 있었으며 라면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되어 밤마다 야근자들이 야식으로 먹을 수 있었기에 식사는 다양하고 풍족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라크 발주처 직원들이 라면 맛을 알게 되어 밤마다 우리 현장식당을 찾기도 했으니 진정한 K-Food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먹을 것이 풍족한 편이었으나 일부 직원들은 휴일에 ‘와디’나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강) 호수에서 이스라엘잉어와 (향어) 비늘이 없어 무슬림들은 먹지 않는 메기 등을 낚시나 투망으로 잡아와서 별미로 먹기도 했다.


이스라엘잉어는 물속에 천적들이 없으니 너무 크게 자라서 한 손으로 들기 벅찰 정도였고 메기는 현지인들이 잡자마자 버리고 가는 것을 보고 몽땅 가져 다가 매운탕으로 해먹기도 했는데 맛은 기가 막혔다. 그렇게 몇 번 우리가 메기를 가져가는 것을 본 현지인들이 나중에는 돈을 받고 팔기도 해서 말로만 듣던 아라비아 상인의 기질을 소소하게나마 (?)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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