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준한] 슬쩍 불어온 바람에도 결국 휘청거렸네

흘려보내지 않고 모아두었지만 결국 고여 썩어버린.

by 이준한

“이래서 검은색 머리 짐승은 함부로 집에 들이면 안 돼”


펜을 물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상황에 왜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돈을 벌어야 했다. 둘째, 더 이상 단기 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 1년을 버티고 싶었다. 세 번째, 나는 그 남자에게 이미 잠식되어 있었다. 그래, 마지막 이유가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수습기간 3개월 동안 세 번의 지각. 상황은 분명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 말에 대한 감정은 이미 희석되어 희미해졌다. 문제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자세였다. 이후 나는 그에게 굴종적으로 변해갔다. 나는 그에게 머리와 허리를 모두 조아렸고, 그가 나를 평가하는 대로 나 자신을 판단했다.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 된 건 병원에 입원한 뒤였다. 입원했다고 연락을 했을 때 안부 인사 대신, 내시경을 한 뒤 전화가 와 ‘근데 원래 몸이 좀 약했냐 ‘라고 묻는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아, 내가 진짜 멍청했구나.


어렸을 때부터 귀가 얇은 편이었다. 말하기는 좋아했지만 자기주장은 약했다. “어른들 말을 잘 들어야지”, “친구들이랑 잘 지내야지”라는 말을 정말 순수하게 모두 흡수했다. 그 결과 나는 가장 흡수력이 강한 스펀지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자기 객관화 대신 타인에 의해 정의되는 사람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빈 껍데기는 타인의 먹잇감이 되기에 너무나도 최적화된 조건이다. 그렇게 재밌고도 끔찍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직장을 그만둔 지 3개월. 실업급여 수급을 기다리는 요즘 반지하 자취방과 헬스장을 왕복하며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동안 나는 열정, 노력, 끈기, 외모, 매력이 부족하다고 들어왔다. 이제 나는 구심점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날씨는 좋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이제 나는 두 다리로 어느 정도 버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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