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나쇼날에서의 저녁: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쓰는 법
지금껏 여행을 하면서 한 도시에서 엿새를 통째로 머문 적이 있었던가? 닷새가 최고였던 내가, 이번 바르셀로나에서는 처음으로 엿새를 채우기로 했다. 한 도시만 주야장천 파보기로 마음을 먹으니 일정에 여유가 생겼고, 그만큼 중간중간 시간이 비는 경우도 있었다. 산 파우 병원을 돌아보고 난 뒤, 저녁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남았다. 목요일 일정이라도 당겨볼까 고민했지만, 짱구언니의 컨디션을 살펴본 끝에 호텔로 잠시 후퇴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우리에게 득이 되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짱구언니는 자기 본연의 생기를 되찾았다. 늘 그렇듯 잠이 가장 좋은 약이었다.
해가 여전히 높이 떠 있는 저녁 여섯 시. 호텔을 나서 다시 길 위에 섰다. 다행히 호텔의 위치는 사통팔달이라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걸어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든, 남쪽이 아니라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카탈루냐 광장. 그곳은 저녁 무렵이 되자, 낮보다도 훨씬 더 활기찼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섞이는 시간. 도시가 낮보다 더 생기있게 살아나는 시간. 많은 이들이 오후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고, 그들의 여유를 함께 느끼며 광장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걸음도 느려졌다. 광장 끝, 엄청나게 큰 자라(ZARA) 매장을 지나칠 때, 짱구언니의 쇼핑 욕구가 꿈틀댔지만, 지금은 식사가 먼저였다. “시간 날 때 다시 오자.”는 약속을 남긴 채 우리는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식사는 엘 나쇼날(El Nacional)에서 해보기로 했다. 단순히 해산물 식당을 찾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주친 곳이었다. 사진으로 보면 너무도 아름답게 식당을 구성해 놓았다. 분명 인기가 엄청 많은 곳이라 경쟁이 치열할까 싶어 석 달 전에 예약까지 해놓았던 이곳. 건물 외관부터가 이미 특별했다. 1870년, 바르셀로나 산업이 한창 번성할 무렵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카페 극장이었으나, 1889년 화재로 재건축되었고, 이후 가죽 공장과 고급 자동차 대리점으로 전락했던 역사를 품고 있었다.
한때의 아름다운 카페 극장의 영광을 뒤로하고 상업적 용도로만 쓰였던 건물. 그 안타까움을 2013년, Subirats Bureau라는 기업이 고급 식당으로 탈바꿈시키며 되살렸다. 이곳은 이제 네 개의 개성 있는 식당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테마를 품은 공간이 되었다. 샐러드를 파는 라 파라다 (La Parada), 타파스를 중심으로 한 라 타페리아 (La Taperia), 스테이크 전문의 라 브라세리아 (La Braseria), 그리고 우리가 예약한 해산물 전문집 라 요트하(La Llotja). 또 서너 개의 화려한 바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7시 예약. 한참 인기 있는 식당의 황금 시간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운이 좋다고 여겼지만, 알고 보니 이 도시는 이탈리아처럼 늦은 저녁 식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7시는 오픈런이었다. ㅋ 그전에 예약이 불가한 이유가 있었다. 식당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화장실을 다녀온 짱구씨가 화장실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전해준다. “너무 좋다"라며 꼭 다녀오라는 권유에 못 이겨 내려가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상류층 파티장에 있을 법한 파우더룸과 우아한 구조의 공간. 그저 식당의 부속 공간이 이토록 인상 깊을 줄이야. 굳이 화장실 때문에 이렇게 흥분할 것까지라고 생각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사소한 것도 즐거움이 되는 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드디어 착석했다. 벽면에 붙은 테이블이라며 짱구씨는 살짝 투덜거렸지만, 나는 오히려 사적인 느낌이 들어 더 좋았다. 라 요트하에서는 얼음 위에 전시된 생선을 골라 요리법을 정하면 되는데, 이렇게 시키면 생선 크기 때문에 단품만 주문을 해야한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양하게 맛보고 싶어 생굴, 크로켓, 문어 다리, 그리고 소금구이한 바다 농어를 따로 주문했다.
음식들은 전반적으로 미국보다 간이 슴슴한 것이 특징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으로 해보는 제대로 된 식사였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매일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 $500 정도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현실은 잠시 꿈처럼 펼쳐질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서비스와 음식을 받았는데 팁을 주지 않고 떠나도 될까? 미국에서는 어딜 가든 팁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 이 순간이 괜스레 찝찝했다. 여행지에서 무례하고 시끄럽기로 하면 2등 하라면 서러울 미국 사람들이지만 이 팁 문화 때문에 어딜 가나 각광을 받는다. 마침 현금을 챙기지 않았기에 카드 단말기로 팁을 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서버는 당연하다는 듯 단말기를 가져왔다. “스페인은 팁 문화가 없어서 팁을 꺼려 한다"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는데, 돈 준다니까 냉큼 받아 가는 걸 보니, 그건 순전히 블로거의 개인적 생각이었나 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어둠이 내리고 있는 카탈루냐 광장을 지나 호텔로 향했다. 일조량이 많은 나라여서인지 밤이 찾아와도 도시는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살아 있었다. 광장 한쪽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젊은이들은 춤을 추거나, 그냥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열정과 평온이 묘하게 공존하는 시간. 바르셀로나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참 신비했다.
호텔 바로 옆 골목으로 접어들자, 눈앞에 익숙한 거리가 나타났다. 람블라스 거리. 보통 같으면 저녁 식사를 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겠지만, 이 도시의 밤은 아직 젊었고, 우리도 그 열정의 흐름에 함께 떠밀려보기로 했다. 작은 상점들과 골목을 누비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1일 1젤라토’를 약속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루가 참 길었다. 그리고, 그 긴 하루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