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의 맛과 소리, 바르셀로나의 숨결
짱구언니 시차 덕분에 날마다 시에스타를 즐기고 있다. 시에스타는 지중해 국가와 남미 국가 등 더운 나라에서 낮잠을 자는 문화로 라틴어의 여섯 번째 시간인 'hora sexta'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스페인도 요즘은 세계화에 발맞추어 시에스타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아주 두메산골을 제외하고는 시에스타를 더 이상 즐기지 않는다고. 그만큼 여유로운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라 해석해도 되겠다.
우리 둘이 암막 커튼까지 사용해 오수(午睡)를 즐긴 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무장을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바르셀로나에 도착 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 호텔 남쪽을 탐험하러 가는 것이다. 예약한 식당이 위치한 곳은 고딕 지구와 람블라스 거리 사이에 위치한 곳인데 구불구불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 매력이다. 예쁜 가게와 밤을 누리기 위해 돌아다니는 인파에 섞여 발길이 닿는 데로 걷다 보면, 원래 가려던 길이 아닌 곳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어차피 길을 다 연결이 되어 있고, 베네치아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막다른 골목은 존재하지 않았다.
길 곳곳에 노천카페가 존재하고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신비한 곳이었다. 이탈리아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곳은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던 로마인들이 지어놓은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너무도 사랑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골목길만 누비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1400년대에서 160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 마치 한국 북촌에 방문했을 때의 그 감동이 다시 소환되어 되새김질이 되고 있는 기분이다.
식당에 도착을 하니, 식당 앞으로 줄을 선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해외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라 맨 앞에 선 사람에게 무슨 줄이냐 물어보았더니, Colom Restaurant이라는 곳 (타파스를 파는 집)을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중이란다. 47 페이지 여행 계획서를 만들어도 식당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는데, 얻어걸려 횡재한 기분이다. 이곳은 다음 날 오기 위해 내 마음속에 저장을 해놓고, 1835년에 문을 열었다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식당 Los Caracoles (로스 카라콜레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노포의 느낌이 확 나는 식당에는 인스타에서 본 주인장 할머니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단체 손님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한참의 대화가 오고 간 후 교통정리가 좀 되었을 때 우리는 예약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우리는 2층으로 안내되었는데 주방을 지나가는 것이 특별했다. 식당에는 항상 준비를 해놓아야 하는 주메뉴들이 요리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일러서 주방에서는 아직까지는 여유가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뒤 (공부를 하고 가서 막힘없이 주문 가능), 식당을 좀 더 돌아보았다.
로스 카라콜레스는 1835년에 Bofarull 가족에 의해 처음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가족의 이름을 따서 Can Borafull라 불렀다. 나중에 이 식당의 가장 유명한 시그너처 요리인 달팽이 요리의 이름을 따서 로스 카라콜레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껏 4대째 가문의 대를 이어 식당이 운영되고 있으며, 최상급의 고급스러운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식당을 둘러 유명 인사의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찰톤 헤스톤 같은 배우를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같은 예술가의 사진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을 꼽으라면, 식당의 크기에 상관없이 가짜 맥주가 메뉴에 있다는 것이었다. 알코올은 들어있지 않으니 아무리 마셔도 배만 부를 뿐 취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내기에는 완벽했다. 첫 음식으로는 1925년부터 이 식당의 메뉴를 차지하고 있다는 Bouillabaisse Soup (부야베스-향신료를 많이 넣은 프랑스 남부 해물 수프)였다. 토마토 비스크하고 비슷한 식감이었지만, 게 맛이 너무 살아 있어 바다의 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살짝 비린 맛 때문에 짱구언니는 심지어 힘들어했다. 다음은 프랑스 달팽이 요리 Escargot (에스카르고)를 기대하며 시켰던 이 집의 유명한 Special “Los Caracoles” snail이 나왔는데, 우리가 아는 달팽이처럼 동그랗고 살이 오동통 오른 달팽이가 아니라 다소 당황했다. 게다가 소스는 향신료를 너무 많이 써서 살짝 역겨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나온 해물찜은 살짝 덜 삶아진 듯 차가운 부분이 있어, 혹시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먹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와 역사를 경험한 것만으로도 값진 시간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골목길을 떠돌며 젤라토를 사 먹었다. '1일 1젤라토'라는 우리에게 한 약속을 지키며 고딕 지구를 또 한 번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르셀로나 대성당 쪽으로 향했다. 작은 광장마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줌마가 헨델의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를 부르는데, 호흡이 짧고 음정이 맞지 않아 정말 아쉬웠다. 그 아줌마가 조금 더 잘 부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경험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많이 부족했다. 아줌마가 내가 좋아하는 곡을 멋있게 불러주었다면 정말 바랄 것이 없는 행복한 밤이었을 텐데.
밤은 점점 깊어지고, 시에스타 덕분에 피로도 없이 걸어 다니던 중년 부부는 어느새 바르셀로나의 열정에 푹 빠져 있었다. 모르는 골목길을 헤매며, 또 하루를 마무리하고, 또 하나의 소중한 여행의 기억을 축척해 갔다. 오늘 하루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