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h에게
안녕, 시간이 꽤 지나는 동안 편지 못해서 미안.
어제는 내가 몸이 많이 아팠어. 왠지 모를 오한이 내 몸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 그런 기분이였어. 아픈 이유는 사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찾을 수 있었는데, 몇 일 동안 나는 무적의 사나이처럼 인생을 살아나고 있었거든. 혹시 공지영 소설가 ‘무소의 뿔처럼 가라’라는 소설을 너는 읽어봤니? 나는 가끔 인생이 정체되고 있을 때면 그 소설을 떠올리고는 해. 그러고는 다시 벅차오르는 거지. 우리 엄마는 공지영 소설가가 너무 여성형 소설을 쓰는 것 같다며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소설을 읽는 건 그걸 쓴 그 작가가 좋아서 읽기도 하지만 그 작품에서 자신이 얻어갈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기도 하니까. 난 좌절의 순간에서도 일어날 용기를 주는 그 작품이 좋아. 그 느낌은 ‘도가니’를 통해서도 받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통해서도 그랬어. 말이 길어졌다. 아무튼, 나는 그런 무소의 뿔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었어. 새벽에 일어나 미처 끝내지 못한 영어 공부를 마치면 동네에 있는 수영을 가. 잔뜩 수영을 하고 배고픈 허기를 나는 학원의 뜨거운 열기로 무마하고는 하지. 몇일 동안 그러면서 난 지칠 줄을 몰랐어. 마치 그 정돈된 지루한 삶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는 일개미 마냥 말이다.
그런 벅찬 삶이 반복되는 동안, 난 너가 생각났어 H야난 군대에서 나오면 항상 널 찾았어. 내가 그때 휴가라는 사실을 죽도록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너에게 보내는 제안으로 결정된 사항이 내 첫 약속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었어. 그 날 시간이 되냐는 말에 넌 항상 흔쾌히 만나자고 해주었지. 군대라는 공간은 정말 지겨운 공간이야. 미칠 듯이 지겹고 힘들어. 난 그런 공간에서 뭐든 새로운 걸 찾아. 매일 먹던 아침을 안 먹어보기도 하고, 게을리 보내던 아침에 일찍 출근을 해보기도 했다가. 갑자기 다른 순서로 업무를 해보기도 해. 진부한 이야기잖아 그렇지?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각자 노력하고 있잖아.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삶인 것 마냥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는 방법으로 말이야. 내 이런 지루함은 보통 짧은 휴가를 통해 해소되고는 해. 그런 꿈만 같은 시간을 너와 함께 쓰고자 했던 건 널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지. 나는 너가 잘 읽히지 않는 사람이라 좋아. 나를 포함해 하찮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비어있고 하찮은 이유로 특별한 일이 생길 때 혹은 가끔 즐거운 일이 생길때마다, 전시해내기 바쁘거든. 너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좋았어.
내가 좋아하는 너는 몇 달 전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 ‘요새는 뭐하고 지내냐’는 말에 너는 백수 놀이를 하고 있다며 조소했어. 아직 25살인 너와 내게는 백수라는 타이틀이 아주 어울리는데 말이다. 넌 꽤나 그 타이틀에 좌절을 하고있는 모양이었어. 25살에 백수가 되어버린 성인에게 이제 군인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진 백수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어. 할 말이 없어진 둘은, 상투적인 대화들을 보내고 받았어. 지금 시기를 즐기라는 말에 너는 ‘이러다 영영 즐길지도..’ 라고 답했고. ‘아냐 아냐 곧이야 곧’ 이라는 말에 넌 ‘과연’이라고 답했어. 뚫어야 하는 창과 막아야 하는 방패의 싸움이 이런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마음이 슬퍼졌어. 내가 좋아하는 너는 결국 입시라는 한 방벽을 넘어선 결과 취업이라는 방벽에 이르렀구나. 내 상투적인 답변은 너에게 무심히 들렸을지 몰라. 그래서 잔뜩 부끄러웠다.
널 좋아하는 만큼 너의 마음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어.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나온, 취업준비생인 너가 느끼는 사회에 내던져진 기분은 어떤 마음일까 하고. 그 걱정의 깊이를 생각할때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해.
그래서 난, 나를 예비 취업준비생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너의 고뇌와 걱정을 반만이라도 같이 느끼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내가 몸살이 난 게 너 때문이라고 하면 그건 너무 오버일까? 너에게 건넨 별 공감스럽지 못한 몇 마디를 생각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난 아침에 수영을 나가고 학원을 나가고 책을 읽고는 해. 내가 아픈 만큼 너는 덜 아팠으면 좋겠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아직도 윤수가 죽기 전 마지막에 꺼낸 말이 떠올라. “나 오늘 죽어요? 떨릴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네” H야 나는 요새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는 떨리고 아프고 끔직한 것들이 한 가득이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그리 아픈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시덥잖은 조언이랍시고 여러 말을 늘어놓았지만, 너는 이 편지를 볼 수 없을테니까, 괜찮다. 우리 오늘 내일 죽어가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자. 반쯤은 미쳐있지만 그게 매력으로 보이는 사람처럼 말이다.
7/9 널 좋아하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