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자까 Jul 22. 2024

할머니의 생신파티에 가지 못한 이유

30만 원이나 주고 끊은 학원 탓입니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할머니가 태어나신 탓에, 우리 엄마도 태어나고, 저도 태어날 수 있었어요. 삶이 힘들게만 느껴질 때는 가끔 저를 태어난 엄마를 탓하기도 하다가, 외할머니를 탓하기도 했었는데 이제 많이 행복해진 탓에 작고 초라한 삶에도 감사하다가, 저의 근원이신 외할머니를 가끔 떠올렸습니다. 말이 길어졌죠? 생신 정말 축하드립니다.

 

할머니를 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저를 데려가려 장어로 절 유혹하기도 했지만, 부풀어 오른 뱃살이 절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줬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고요. 할머니를 뵈러 못 간 이유는 제가 토익시험이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토익시험 따위가 할머니보다 중요하냐고요? 당연히 아니죠. 토익시험 따위는 언제 봐도 상관은 없습니다. 물론, 토익시험을 보러 30만 원이나 주고 토익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점은 꽤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건 할머니를 보러 가지 못하는 핑계는 되지 못합니다. 사실, 당신의 조금 더 쇠약해졌을 얼굴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게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의 시간이 저에겐 빠르게 흐릅니다. 제가 자라나는 만큼 당신의 나이가 들어갈 것은 운명이라지만, 그 운명을 마주하는 건 항상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고,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제가 다니는 유치원 원장님이셨던 할머니는 그 당시에도 참 카리스마 있고 가끔은 무섭고 어떤 날에는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언제나 닮고 싶었던 분이셨죠. 어느 날은, ‘개미’라는 이름의 간단한 수학 학습지 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답이 잘 풀리지 않아, 그 어린 손으로 땀을 삐질삐질 대고 있는데 당신은 들어오셔서 제 채점 결과를 보시듯이 저를 일으켜 세우시고 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절 칭찬했습니다. ‘훈민이 가 참 잘한다’ 구요 간단한 한마디였습니다. 그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들어온 은총에 관심에 전 몸 둘 바를 모르고 방황했습니다. 전 아직도 그 칭찬이 실제로 저의 실력에 대한 칭찬이었는지, 아니면 당신의 손주의 기를 한번 살려주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는지 그것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거 아세요? 당신의 칭찬 한 번이 절 엄청난 관종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칭찬도 받아본 아이들이 잘 받는다고. 저는 그때부터 어디서나 어떤 곳에 가서든 가장 훌륭한 학생이 되려 노력했습니다. 어딜 가든 먼저 손을 들고, 제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전 그때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모두에게 닮고 싶은 그런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할머니가 저의 영웅이듯 말이죠, 그러므로 제 훌륭함은 거의 대부분 할머니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할머니 저는 부끄럽게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영웅이 되고 싶었는데 영웅같이 욕심은 많고, 영웅보다는 영웅 옆에서 질투하는 빌런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할머니 보기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전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독특한 성격 탓에 친구도 많이 없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제 가족들과 이모들과 이모부들의 모임에 자주 끼고는 했었는데 그 자리가 가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못난 날 예뻐해 주는 모든 친척들을 보며 , 그렇게 헤어질 때가 되면 나 이쁘다고 5만 원씩 주머니에 꽂아주는 걸 보면서 그런 사랑을 느끼며 작은 꿈 하나를 키워갔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가족들, 이모들, 삼촌들 모두 제가 비행기에 태워 어디든 보내주겠다고요.

 

어린 마음에 어린 15살 정도의 나는 10년 정도가 지나면 그런 꿈을 이룰 만큼 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웬걸요. 전 아직도 용돈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뇨, 사실 덩치가 더 커져서, 머리가 더 커서 더 많은 돈을 용돈으로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 언제쯤 제1인분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요. 우리 친척들 어디든 보내주기 전에 저 혼자는 먹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쯤 될 수 있을까요. 전 그게 참 궁금합니다. 잘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은 올까요?

 

할머니 저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왜 벌써 평온해졌나고 당신은 저를 꾸짖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할머니처럼 벌써, 사납고 격정적이고 시퍼런 건 싫습니다. 사소하고 평온하고 차분한 것이 좋습니다. 전 할머니를 참 닮았습니다. 그게 참 걱정이면서도 좋습니다. 할머니도 저처럼 더할 나위 없는 차갑고 평온한 여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이전 05화 너만을 위한 연극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