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너라는 벽
나는 회식의 여왕이다.
점심 회식이라는 것의 정체에 대해 아직도 의문을 제기한다.
자고로 회식이란 먹고 마시고 떠들고 신나서 가끔 깽판도 쳐야 하는 것이니까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면 당연히 저녁 이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술을 같이 하느냐 하지 않느냐만 변했을 뿐.
회식은 내가 아무리 금주를 한다고 해도 나를 피해 가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다져 놓은 우리 회사 회식문화의 기반은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회식의 전설로 내 뒤를 따라붙는 삼색주 사건이 발생했다.
술꾼 도시여자들만큼 내가 외모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술을 말고 따고 붓는 기술 하나는 그 누구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이곳 이 회사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아니 다들 술을 삼대독자 집안 제삿날 제주 따르듯 배운 모양들이었다.
무료하고 지겨운 술자리가 이어져 가고, 세상 더러운 잔 돌리기도 시전 되며 그 술잔이 내게로 밀려올 때쯤이었다.
내 기술을 이런 무료하고 꼰대스러운 무교동 스타일에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얌전히 주는 술만 받아먹고 있고자 했다.
문제는 잔 돌리기 술잔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또 마침 옆 테이블에 복분자주가 생뚱맞게 한 병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조법은 간단하지만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는 심오하고도 심플한 매력적인 삼색주 제조에 팔을 걷었다.
밀려오는 잔 돌리기 잔을 기꺼이 받아 그 잔에 맥주를 높이 들고 흰 거품이 노란 맥주와 2대 1의 비율로 형성될 때까지 따른다. 그 위로 복준자와 소주를 8대 2로 희석한 붉은 액체를 맥주의 거품이 꺼지지 않도록 유리잔 벽을 타며 정성껏 내려보내본다. 그러면 정확히 3대 1대 3의 아름다운 노랑 빨강 흰색의 청연한 삼색주가 완성된다.
이 아름다운 술은 다 마실 때까지 그 색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 제조자의 기술력이다. 내가 그걸 가능하게 한다. 내가.
완성된 술잔은 내가 마시지 않는다. 그 회식자리에서 제일 높은 양반한테 상납하면 된다. 그 뒤로는 잔 돌리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어르신들과 동료들이 자기 술잔을 들고 "나도 한잔만"을 외치며 몰려들고 나는 그저 술병 세 개를 들고 "줄을 서시오!"만 하면 된다.
그날, 잔 돌리기를 실컷한 타인의 타액이 가득 배인 삼색주잔을 들이킨 높으신 분은 지금은 퇴임하셨던 장관급의 모 위원장님이셨고, 후문으로는 독실한 종교적 신앙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그 오묘한 술잔의 매력에 이끌려 그날 원샷하시고 다음날 출근을 못하셨다는 설도 돌았다.
전설이다. 믿거나 말거나.
오늘은 어찌 됐든 회식이 있는 날이다.
금주를 시행한다는 소문을 사방팔방에 뿌리고 다녔으나, 내 동료들은 나의 의지와 목표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뿌듯함이 앞서 내 앞에서 술을 마시겠다는 그들을 탓하지 않겠다.
장소는 구워주는 삼겹살집. 시간은 당연히 퇴근 이후다.
두렵지 않다. 내게 신세계를 가져다준 논알콜릭맥주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논알콜릭 맥주 두 캔을 우선 에코백에 장착하고 회식장소를 향했다. 동료들은 그것도 콜키지가 있는 거 아니냐며 우려를 표한다.
나도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논알콜릭 맥주를 테이블에 얹는다. 고기를 구워주는 직원을 향해 선 약간 측은해 보이는 미소를 보낸다.
"제가 술을 못 마셔서요. ㅠㅠ 이거 논알콜 맥주인데 좀 마셔도 되겠죠?"
직원의 표정이 '이런 레미제라블~!'이다.
한국 사회에서 술도 못 먹는데 회식에 불쌍하게 끌려온 직원의 컨셉, 게다가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보겠다고 논알콜맥주까지 챙겨 들고 온 직장인!!!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
고기 굽는 직원은 커다란 엄마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금주 20일 차, 이제 회식이라는 벽도 가뿐히 넘어섰다. 술이 없어도 즐거운 회식자리는 그대로 이어졌고, 술을 강요하지 않는 회식자리에서 이렇게 버틸 수 있게 해 준 논알콜맥주의 존재에 감사한다.
술이 강제되는 회식자리가 문제였지. 내가 즐기고 행복함을 느끼는 저녁 회식자리마저 금주를 이유로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내 금주 따위는 걱정과 염려의 영역에서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자기들 술잔에 비치는 영롱한 소주 방울에만 집중해 줄 수 있는 배려심 깊은 아름다운 내 동료들이 있었기에 내 금주는 기쁘게 이어질 수 있는 이다.
닭발을 뜯으며, 선주후면으로 마무리되는 2차까지 잘 넘고 넘어 집으로 돌아온다.
고마워 그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