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베이징, 중국
중국의 최대 도시인 베이징은 원, 명, 청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중국의 수도입니다. 해외여행자유화가 되고 나서도 사회주의 국가를 이유로 베이징은 한국인들이 궁금해하긴 했으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인구만 2천만명이 넘는 이 곳 베이징은 오랜기간 중국의 심장역할을 해온 곳이기에 수많은 구경거리들이 있습니다.
세계최대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하기가 무색할 만큼 자유로운 왕푸징 거리에서부터, 황제의 국가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대하게 펼쳐진 자금성까지 역사와 문화가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각 장소마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에 들르는 외국인들이 빠트리지 않고 방문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천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쯤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베이징 황성의 내성의 남문입니다.
명나라 영락제가 1420년 처음으로 건축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늘의 평안한 문'이라는 뜻으로 '명을 따르고 하늘을 섬겨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受命于天, 安邦治民)라는 문구에서 '천안'이라는 글자를 가져와 천안문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자유롭게 평온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곳이 천안문 광장입니다.
장엄하기까지한 붉은 천안문의 가운데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자리합니다. 마오의 초상화 양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중앙인민정부 만세(中华人民共和国万岁 中央人民政府万岁)라고 적혀져 중국이 인민공화국임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천안문을 지을 때 처음 그 뜻처럼 평안해보이기만 한 이 장소는 중국 현대사의 한 비극이었던 '천안문 민주 항쟁'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989년 4월 부터 6월까지 2개월간 발생했던 이 사건의 계기는 후야오방(중국공산당 총서기, 중국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고자 함. 정치국 회의 발언 후 심근경색으로 사망)의 죽음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부패와 등샤오핑의 개혁개방이 불러온 여러 사회적 모순과 빈부격차와 공산당정권의 독재 등 수많은 원인이 내재되어 발생했습니다.
시민들은 민주적 선거실시와 시위를 제한하는 규정 폐지, 부패관료에 대한 척결 등을 내세우며 시위에 들어갔습니다. 베이징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대학생,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주축이 되어 민주화 요구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점차 각계각층, 시민들까지 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전국에서 집결한 대학생들까지 총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고 합니다.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사람들은 집회의 성공을 꿈꾸며 서로를 북돋았습니다.
비극은 한순간에 몰아닥쳤습니다. 1989년 6월 3일 밤 중국공산당은 베이징 외 지역 출신의 공안과 군병력을 대거 투입했습니다. 인민해방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들은 인민을 향해 총을 쏘고, 탱크를 밀어부쳤습니다. 잔혹한 밤의 대학살이 지나가고 난 후 지금의 이 아름다운 천안문 광장 앞은 수많은 시신들로 가득했다고 전해집니다.
언론은 학생들을 폭도처럼 보도했고, 중국정부의 잔혹한 진압은 감추어버립니다. 중국정부는 이런 민중의 움직임을 국가 전복세력으로 규정해버렸던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외치기 위해 자율적으로 모여들었고 당당하게 국가에 권리에 대한 요구를 했던 평화적인 집회였음에도 말입니다.
집회의 자유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그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21조 제2항에서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 너머의 국제규범에도 세계인권선언문에도 집회와 결사는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상과 제도가 다른 국가라 하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권리는 동일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중국은 아름답고 화려한 조명 뒤로 천안문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1987년 대한민국에서도 수많은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한데 모여서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결국 독재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2016년과 17년 차가운 겨울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외쳤습니다. 결국 정권은 바뀝니다. 한사람이 외치면 공허하게 흩어지는 말이라도 여럿이 모여 외치게 되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아직은 조금은 미흡하지만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간 천안문에서 또 다시 사람들의 자유로운 외침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천안문의 이름처럼 나라를 평안히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민들의 외침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아닌, 국가가 나서서 그들의 외침을 듣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어야하겠습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을 향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한 청년의 인터뷰의 내용입니다.
"어디 가는건가요?"
“시위하러 가는 중입니다.”
“왜 가는거죠?”
“ 제 의무니까요. (MY DU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