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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禁酒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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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May 15. 2016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어 설레던 봄

禁酒 Day 29

20160514


    졸업 25주년 재상봉의 날이었습니다. 대학 동기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석 달 동안 마음을 모아 열심히 연습한 합창공연도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 오늘 같은 날, 술을 안 마시는 것은 참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딱딱해진 가슴을 다시금 부드럽게 만져 준 합창의 기쁨으로 잘 견디었습니다.

오, 사랑! 당신의 이름에 나의 마음 떨려요!

    사랑이, 그리고 친구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마음을 떨리게 합니다. 그렇게 가슴앓이를 했던 합창의 시간이 무대 위에서 폭풍같이 지나간 이제 며칠 몸살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이미 새살이 돋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한 달 간 술을 마시지 않은 몸에 백여 명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에너지가 내일을 오늘보다 더 밝고 따뜻하게 살아낼 새로운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그 봄은 길고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의 禁酒일기는 지난달에 써 두었던 글로 마무리합니다.



    “입을 더 동그랗게 만들어서 ‘아~~~~’ 합니다.”  치과?  아닙니다.

    “이번엔 one two three four five six seven eight seven six five four three two one으로 해볼게요.” 영어교실도 물론 아닙니다.

    “여러분 옆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테너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네요.” 네, 맞습니다. 합창 연습 중입니다.


    졸업 후에도 가까이 자주 보던 친구들도 있지만, 몇 년 아니 몇십 년만에 보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빛바랜 졸업사진 속 얼굴을 알아볼라치면 여지없이 어색한 웃음을 교환합니다. 그래도 어느 하나, “너 왜 그렇게 됐냐?” 대신에  “너 똑같구나!”로 인사합니다. 그나마 학교 때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낫습니다. 25년이 아니라, 48년 만에 처음 마주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내일모레 오십을 바라보는 여학우들과 남학우들이 쭈뼛거리며 주저할 때엔 먼저 인사한 친구들이 친절하게 소개소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첫날부터 정해진 규칙이 “반말하기”였던 덕에, 일단 말을 트기가 무섭게 삽십년지기들처럼 빛의 속도로 친해집니다. 같은 학교를 동시대에 함께 다녔다는 인연의 끈이 서로를 묶어놓고 나니, 머리가 조금 벗어졌거나 셌거나, 배가 조금 더 나왔거나 말거나 할 것 없이 우리는 “1991년 졸업 연세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응답하라 1988”로 하나 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합창은 그렇게 쉽게 하나가 되지 못하네요. 학교 때 노래 좀 했다는 친구들조차도 마음만 “25년 전”일 뿐 목소리는 곧 “쉰”소리가 날 듯합니다. 합창단을 얼굴로 뽑는다기에 오게 되었다는 친구들도 여럿 있습니다. 한 파트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면,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장대소합니다. 틀린 사람이 부끄럽지 않냐고요? 천만에요. ‘다들 내 넉에 즐겁지 않냐?’는 표정으로 씩 웃으면 그냥 지나가지만, ‘누가 틀린 거야?’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 모두 한 마음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며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르는 낙엽에도 자지러진다’는 사춘기 소녀들처럼 크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마흔여덟의 나이 탓에 뻔뻔한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연세의 이름으로 모여서 울기도 웃기도 했던 기억들을 나누어 가진 ‘너와 나’의 친구들이 다시 모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중견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두 친구, 박은실과 김철 동문의 지도 아래, 각 파트별로 음악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연습하기를 두 달여 지나고 나니 이제 조금 둥글둥글하고 말랑말랑한 소리가 음대 강의실에서 울려납니다. 연습 중에 잠시 혼자 화장실에 갔다가 연습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합창 소리를 들으면 여러 가지 감동이 온몸을 타고 흐릅니다.  이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합창에 앞에서 뒤에서 알게 모르게 수고하는 친구들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연습실에 김밥과 빵과 물이 끊이지 않고, 카톡과 밴드에 웃음이 넘쳐납니다.


    맥주 한 잔씩 마주하는 뒤풀이 자리에 조하문의 “눈 오는 밤”이 어울리던 겨울에 시작한 합창 연습이 매화와 산수유를 타고 넘어서 이제 벚꽃가지 사이로 노랫가락을 울립니다. 다들 정봉이나 정환이, 그리고 보라 같은 헤어스타일에 동룡이 같은 안경을 끼고 오르내리던 백양로는 그 시절 같지 않지만, 아직도 학생식당에 앉으면 가마니로 퍼담아 온 듯한 추억들을 풀어냅니다. 용재관 앞 진달래도, 광복관 앞 벚꽃도 아스라이 기억 속으로 사라진 지금, 그래도 이 봄이 설레는 것은 오늘 저녁에도 저곳에서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다려지는 시간의 종착역이 이 봄날 오월의 어느 하루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친구들 모두가 깨알같이 가슴에 새긴 까닭입니다. 노래는 우리 마음을 담아 교정에 울려 퍼지고, 우리는 또 그 노래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래는 친구들을 기억할 겁니다, 하나하나, 그리고 모두 함께!


20160405



아래 링크는 같은 매거진, "禁酒日記"의 이전 글입니다.

https://brunch.co.kr/@6901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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