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기상특보 체계와 시민의 안전
올해는 아직 비와 바람으로 인한 재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분이 다음 주말 경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보고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정리해서 올려 봅니다.
2013년 8월 14일, 특급 태풍 우토르가 홍콩을 지나면서 태풍경보 8호가 발효되는 바람에 홍콩이 하루 휴무였습니다. 말이 "지나간다"이지 사실 홍콩에 가장 근접했을 때도 홍콩에서 300km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강력한 태풍이라 홍콩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태풍경보 8호가 내려졌습니다. 이렇게 태풍으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하루가 휴일이 되는 경우에 서울에 계신 분들의 반응들은 이렇습니다.
"아니 벌써 태풍이 여덟 개째야?"
"왜 회사를 안 가?"
"그럼 5호나 6호, 7호, 그런 경보도 있어?"
"서울 본점이 일하는데 홍콩 지점이 왜 안 나와? 빨리 출근해!"
태풍인 경우에는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이해하시는데, 만일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이유로 Black Rainstorm 경보가 발효되어서 회사를 안 나간다면 한국에 계시는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동시에 무척 부러워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가 정말 많이 와서 도로의 하수구가 거꾸로 넘치고 지하철이 침수되기 전에는, 혹은 사상자가 수 명 또는 수십 명에 이르러서 재해지역으로 선포되기 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출근을 해야 하고 학교를 가야 합니다,
홍콩은 일정 수준 이상의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면 도시 기능을 미리 중지시킵니다. 태풍의 경우에는 1, 3, 8, 9, 10의 다섯 단계로 구분하고, 비바람은 노랑(amber), 빨강(red), 검정(black)의 세 단계로 구분하죠. 이게 아주 간단한 시스템이지만, 재해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최단시간에 복구하는 대단히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홍콩으로 태풍이 다가오고, 우리나라 방향으로 태풍이 올라간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스템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위의 사진은 홍콩 기상청 홈페이지(http://www.hko.gov.hk)의 첫 화면입니다. 사용자의 상황에 알맞게 user interface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서, 원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메인 화면(http://www.hko.gov.hk/contente.htm)으로 이동하면 조금 투박한 듯 보이지만 날씨에 관해 최우선으로 알려야 할 정보들이 한눈에 들어오게 꽉 채우고 있습니다. 로고 아래 세 줄 표시 홈 메뉴에는 시간이 생명 같은 분들을 위해서는 그래픽을 뺀, Text Only 버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상청 홈페이지(http://www.kma.go.kr/index.jsp)는 역시 IT 강국답게 멋진 디자인으로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또한 생생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홈페이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날씨정보가 홈페이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 정도이고, 색깔과 그래픽이 날씨 정보들을 기타 정보들과 차별적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정보의 가독성과 분별력이 약하고, "Text Only"와 같은 메뉴는 없는 듯합니다.
기상특보 체계를 살펴보면, 홍콩 기상청은 누구라도 알기 쉽게 그림과 숫자를 이용해서 정의한 21개의 기상특보 표시를 사용합니다. 거의 설명이 필요 없는 수준입니다. 태풍 경보 8호의 경에 풍향에 따라 네 개로 나누어지지만, 바람이 일단 불기 시작하면 일반인들에게 풍향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공서, 각급 학교, 각종 사업장 및 쇼핑센터, 아파트 관리사무소, TV 방송과 신문 등에서 똑같은 기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혼돈이 생길 이유가 없고 남녀노소 모두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일반시민들의 안전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1~12번까지의 기상특보가 내려지면 그 즉시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이 (거의) 모든 건물의 입구와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 해당 기상특보의 내용을 그림과 함께 표시해서 건물 입주자들과 지나는 행인들이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래 사진은 2012년 7월 4일 새벽 2:42에 찍은 제 전화기 상의 홍콩 기상청 앱의 메인화면입니다. 태풍경보가 가장 강력한 10호이고, 비바람은 노란색이므로 그래도 약한 수준이나, 천둥번개가 치고 있으며, 북쪽 신계지역은 홍수를 주의하고, 모든 산비탈과 언덕이 있는 곳에서 산사태를 주의해야 한다는 기상특보입니다. 글자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우리나라 기상청의 기상특보 발표 기준입니다. 매우 세심하게 각 특보를 두 단계로 구분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별, 종류별 특보를 국민에게 쉽고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저 기상청이 특보를 발령하면 방송과 신문, 그리고 다수의 인터넷 매체들이 해당 특보를 전달합니다. 주의보와 경보 중에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인지가 매번 헷갈리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특보 발령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동일한 기호를 동시에 공유하는 방법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방송에서 이런 멘트를 반복해서 듣습니다.
"태풍경보가 발효 중입니다. 저지대의 주민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고 계속해서 KBS 라디오의 재난 특집 방송과 뉴스속보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도 떠내려갔고, 학교에 간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 언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TV 앞에 붙어 앉아 있을까요?
다음으로 기상특보가 발령되었을 때의 행동요령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홍콩 기상청의 기상특보기준에 맞추어서 홍콩 정부의 노동국은 행동요령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전문은 첨부된 파일, "Rainstorm.pdf"를 참조하세요. 그리고 모든 관공서와 사업장, 각급 학교 등은 이 권고안에 따라서 (99% 동일한 내용으로) 행동지침을 마련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행동지침의 세부내용은 복잡할지 모르지만,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규칙은 매우 간단합니다. 8호 또는 그 이상의 태풍경보가 발효되면 일단 정부청사를 비롯한 관공서가 일손을 놓고 문을 닫습니다. 당연히 민간 사업장들도 문을 닫습니다. 자리를 꼭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직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에도 한꺼번에 퇴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교통혼잡을 우려해서 순차적으로 (in a staggered manner) 퇴근하도록 업무에 따라 퇴근 순서가 직장 내에서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퇴근하지 못하는 직종이나 직무를 완수하기 위해 대중교통수단이 운행을 중지한 후까지도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을 위해서 직장 내에 대피소를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오전 출근 시간 전에 이러한 심각한 경보가 내려지면 당연히 출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풍경보가 8호에서 3호에서 내려가면 그 후로 2시간 이내에 출근하고 관공서도 다시 문을 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과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서 홍콩 기상청은 태풍경보 8호의 경우 발효시각 2시간 전에 미리 공지를 합니다.
이러한 행동지침의 실천에는 예외가 없어서, 홍콩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산업 중의 하나인 금융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홍콩 증권거래소조차도 오전 7시까지 태풍경보가 8호 이상이면 (또는 블랙 레인 경보이면) 일단 오전 업무가 중지됩니다. 홍콩 증권거래소의 거래시간에 관한 규칙이 아래 그림에 예시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의 학교는 물론 자동으로 휴교입니다. 절대로 아이들이 비바람 부는 야외 어딘가에서 헤매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학교 수업시간 중에 태풍경보 3호가 내려지면 미리 각각의 학부모들과 약속된 방법에 따라서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부모가 데리러 가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가 올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습니다. 이런 재난 규칙을 어기면 HKD 일십만 불의 벌금형 또는 1년 징역입니다. 몇 해 전에 SoGo백화점이 종업원들에게 태풍경보 8호가 해제되고 두 시간이 아닌 한 시간 반 안에 출근하라고 해서 말썽이 난 적이 있었죠.
이 글을 처음 썼던 2013년 8월 14일도 홍콩은 태풍경보 8호가 발효되어 하루 종일 도시 전체가 쉬었습니다. 아래는 블룸버그(Bloomberg)가 보도한 어제의 홍콩 거리 사진 하나입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고 있지 않았지만 태풍경보 8호가 발효 중인 상황이기에 평소에 가장 복잡해야 할 센트럴 거리가 싹 비었습니다.
홍콩에서도 가끔씩 태풍 등의 자연재해로 인해서 사고가 납니다. 가파른 언덕길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휩쓸려 미니버스가 미끄러져 가로수에 부딪히기도 하고, 고층아파트 창문 밖에 매달아 둔 에어컨 실외기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가로수가 부러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항구에 매어 둔 배들이 파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사망과 실종 뉴스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태풍이 불어올 때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기상청 이외에 국민안전처와 국가재난정보센터, 국가태풍센터 등의 홈페이지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자연재해와 기타 여러 가지 재난 상황을 알리고 대비하는 한편, 재난 시 국민행동요령 등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이러한 시스템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국민들이 보다 편리하고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각 기관의 홍보나 업무보고에 관련한 내용보다는 재난 정보 자체를 보다 직접적으로 자세히, 그러면서도 간단하고 알기 쉬운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홍콩과 비슷한 방법으로 태풍이 오고 홍수가 날 때 경보의 등급에 따라 자동적으로 작동하도록 약속된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사회의 다른 시스템에서도 관찰되는 이러한 효율적 시스템이 홍콩에서 잘 작동하는 이유가 홍콩이 인구 7백만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행정단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도시가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의 효율성을 그렇게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순위에 둔다면, 우리나라도 이 간단한 시스템 하나를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말입니다. 지구온난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기후도 아열대성에 가깝게 바뀌면서 장마와 태풍 등으로 인한 피해가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반나절 혹은 하루를 쉰다고 해서 업무상 사업상 손해가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기보다는 내 가족과 내 이웃이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는지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피해도 줄어들어서 복구비용도 적게 들고, 결국은 이득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생명은 그 비용을 따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래는 태풍 우토르로 인하여 태풍경보 8호가 발효되기 직전에 찍은 홍콩의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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