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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10. 2016

밀포드 사운드에서 만나는 "기다림"

Milford Sound, 뉴질랜드

뉴질랜드 남섬의 서남단 해안에는 Milford Sound라고 하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피요르드(fjord)와 같은 빙하 지형으로 빙하기가 남겨 놓은 아름다운 자연유산입니다. 길게 펼쳐진 피요르드 해안선 가운데 유독 밀포드사운드가 유명한 이유는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랍니다. Queenstown에서 매일 운행하는 관광버스를 타면 약 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동차 도로로 300km가 조금 안 되기 때문에 구글 지도에서는 대략 3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립니다. Te Anau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면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부터 꽤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야 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짙은 안개를 만나거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멋진 풍경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퀸스타운에서 직선거리로는 불과 60~70 여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된 국립공원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심지어 테아나우에서 밀포드사운드 사이의 왕복 200km 구간에는 주유소 조차 하나도 없습니다.


대개 정오에서 1시 사이에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퀸스타운에서 7시 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거나, 초행길의 운전자는 그보다 일찍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북반구의 여름인 반면에 남반구에서도 저 아래쪽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겨울 산악지방에서는 8시 가까이 되어야 하늘이 밝아져 오기 시작합니다. 그동안은 가로등도 없는 시골 국도와 비슷한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데, 정말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퀸스타운보다 남쪽에는 인구가 오천 명을 헤아리는 도시가 없기 때문에 그 사이를 오가는 고속도로 주변은 해가 뜨고 양 떼를 헤아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기 어렵습니다.

(Homer Tunnel을 지나기 전 풍경입니다.)  ©오주현
(Homer Tunnel 앞 풍경입니다.)  ©오주현

그렇게 새벽을 뚫고 안개를 헤집고 멀리 돌아와서 다시 Remarkables 산맥을 마주하면 비로소 밀포드사운드의 관문이 되는 Homer Tunnel을 만납니다. 해발 1,000m의 고지 위에 19년간의 공사 끝에 1954년에 완공된 1.2km의 호머 터널은 3분 여 간격으로 주어지는 신호에 따라 통과해야 하는 일방통행 터널입니다. 터널을 벗어나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네 시간이 넘는 운전의 피곤함이 싹 가시는, 영화관에서 보았던 ‘반지의 제왕’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 대단한 풍경이 고요한 빙하의 협곡 사이로 짙푸른 바다와 마주 닿는 곳에 이르면 짧고 낮은 탄식 같은 감탄사를 내고야 맙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그저 작은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이죠.

(Homer Tunnel)  ©오주현


(Homer Tunnel을 지난 후 풍경입니다.)  ©오주현
(Homer Tunnel을 지난 후 풍경입니다.)  ©오주현

밀포드사운드가 담아내는 자연의 모습은 히말라야처럼 거대하거나 태평양처럼 광대하거나 남극의 얼음바다처럼 극적이지 않습니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빙하와 바람과 파도에 깎인 산과 바위들은 오히려 둥글둥글하기까지 해서 마치 동네 뒷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시간이 멎은 것 같이 고요한 자연의 모습 속에 물결이 잔잔히 일렁이고 바닷새들이 먹이를 찾아 습지를 거닐거나 수면 위를 날쌔게 날고, 수십 억 물방울의 세례를 만들며 폭포가 떨어지고, 짠 기운마저 얼어붙은 것 같은 바람이 남극의 바다로부터 불어옵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의 엔진 소리와 관광객들의 끊임없는 카메라 셔터 소리만 지우면 밀포드사운드는 수 만년 전의 원시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오주현

퀸스타운에서 비행기를 타고 산을 넘기보다는 그 먼 거리를 돌아서 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밀포드사운드는 몇 십만 년을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수 천명의 사람들이 망치를 들고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터널을 뚫고 길을 내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미천한 인간은 새삼스레 평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다섯 시간을 힘들여 차를 몰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세상 모든 일이 공들인 만큼 얻게 되어 있는 것을 왜 자꾸 잊어버릴까. 모든 것이 적절한 때가 있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을……

 ©오주현
 ©오주현

빙하에 깎인 밀포드사운드의 산들이 호수같이 맑고 고요한 바다에 그 모습을 드리울 때에도, 먼 바다에는 남극바다에서부터 올라오는 세찬 겨울바람이 불고 거친 파도가 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수평선이 반듯한 일직선이 아니라 톱니바퀴처럼 보입니다. 오늘 나만이 겪고 있는 것 같은 고통이 수평선을 구불거리게 만드는 거센 파도만큼이나 견디기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바람이 지나고 파도가 잦아들면 새로운 고요와 평화가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苦盡甘來. 축복의 선물은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싸여 있다고 했습니다.

 ©오주현

밀포드사운드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는 겨울비도 그친 서녘 하늘 위로 엄마의 품 같은 붉은 노을이 말을 건네 옵니다 –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날일 것이라고……

 ©오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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