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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13. 2016

가벼운 일탈 - 그 자유로운 영혼들에게 보내는 박수

융프라우, 스위스

북한산 비봉이 아닌 시내 한복판에서도 가끔은 속이 후련하게 소리쳐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해수욕 시즌이 아닌 초가을 바닷가에서 갑자기 바다에 뛰쳐 들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월드컵 4강에 올라간 날이 아니라도 호프집에서 신나게 노래하며 취해 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고 체면을 잃지 않고 적당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못하고 마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고 욕망이 가라앉으면 잊어버리지만, 어떤 일들은 계속 마음속에 살아남아서 한참이 지난 뒤에도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나 그것이 남에게 폐가 되거나 크게 부적절한 행동이 아니며, 다만 약간의 용기(또는 어린 치기)만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더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 오주현
© 오주현

2011년 여름, 유럽의 정상, 알프스의 지붕이라는 융프라우에 갔을 때입니다. (실은 융프라우가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닙니다.) 숙소를 정했던 그린델발트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며 양쪽에 우뚝 선 아이거와 융프라우를 바라보는 일은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알프스의 여러 거봉들 가운데에서도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젊은 처녀’, 융프라우는 착공한지 100년이 된 산악철도를 타고 올라가는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산세를 구름 사이로 살짝살짝 수줍은 듯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클라이네 샤이덱을 지나 정상의 스핑크스 전망대가 보일 즈음엔 경이로운 빙하와 만년설의 아름다움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한여름의 눈부신 햇빛 아래 우뚝한 알프스는 금방이라도 하이디가 뛰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 오주현

그런데 웬걸 정상의 융프라우요흐역에 내려보니 8월 초 한여름에 12월 대관령 같은 날씨가 우리를 반깁니다.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니 얼음 같은 눈 위에 서있기도 어렵고 뤼치넨 계곡 위의 구름은 알레취 빙하와 섞여서 어디가 구름인지 어디가 빙하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춥고 바람만 부는 곳에 그냥 왔다 가면 추억이 모자랄 것을 걱정했던지 전망대 안팎에는 컵라면까지 파는 스낵바와 함께 짧은 스키, 썰매, 빙하 트레킹 등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공중에서 도르래에 매달려 눈밭 위를 가로질러 내려가는 Zip Line이 인기가 많아서, 우리 아이들도 예외 없이 타고 내려왔습니다.

© 오주현
© 오주현

너무 추워서 내려가려 할 때, 계곡을 떠나갈 듯한 함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습니다. 옷을 안 입고 타면 공짜라는 광고에 젊은 친구들 무리 중의 하나가 완전히 발가벗고 나선 겁니다. 털모자로 가운데만 가리고서는 눈밭을 지나 철사다리를 올라 도르래를 타고 내려올 때, 융프라우 정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죠. 아무도 뛰어내리지 않는 번지점프대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누가 한 번 점프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즐거움을 모두에게 선사한 그 젊은이는 알프스의 빙하 계곡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박수를 받았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웃음을 입가에서 거두려 할 때쯤, 이번에 더 큰 함성이 터졌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절대로 남자에게 질 수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영하 10도에서 벗어재꼈습니다. 비키니 라인마저 선명한 비너스의 몸매를 드러내며 모두의 눈앞을 휙하니 스쳐지날 때엔 만년설마저 녹여 버릴 듯한 뜨거운 함성이 알프스의 정상을 메아리치고 또 쳤습니다. 정말 난리도 아녔죠. (아래 동영상)

© 오주현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둔 나이가 되어버려서였는지, 아니면 너무나 엄두가 안 나는 퍼포먼스였기 때문인지, ‘나도 한 번 해 보았으면 재밌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부러운 것은 있었습니다. 뒷감당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치기에 가까운 용기와 죽을 때까지 잊기 어려울 추억의 장면을 위해 너무나도 유쾌하고 통쾌하게 북돋우고 즐길 줄 알았던 친구들……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하고, 우리가 쉰다섯 살쯤 되었을 때, 제일 가까운 고등학교 동기동창들이 모이면 우리는 어떤 가벼운 일탈로 배꼽 잡고 웃을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아, 한 친구는 끼워 주기 어렵겠네요. 막내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가야 할 겁니다.

© 오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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