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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May 25. 2016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빈사의 사자상, 루체른 (Löwendenkmal, Lucerne)

    그곳에 가면 늘 서늘한 기운이 감돕니다. 단지 그곳이 2만 년 전에 형성된 빙하 동굴 바로 옆에 위치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철제 난간으로 만들어진 입구를 지나 벽돌을 깔아 놓은 바닥 위로 몇 걸음 내딛이면 바로 옆의 빙하 동굴에서 내려온 물이 고였을 듯한 작은 연못을 만납니다. 연못 건너편에는 수백만 년의 빙하 시기를 견디어 온 듯한, 푸른색과 회색이 얼음처럼 창백하게 뒤섞인 화강암 절벽이 서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손으로 깎아내린 듯한 절벽의 한 가운데에 창에 찔려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가로 10m, 세로 6m나 되는 커다란 사자는 연못을 사이에 두고 산 자(者)와 죽은 자(者)를 구분하여 줍니다. 부러진 창이 몸통에 박힌 채 두 조각이 난 방패 위에 앞발을 얹고 신음하는 사자는 스위스인들의 가슴 절절한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오주현

  Scene #1    

    시이저의 로마 군대에게 쫓겨 알프스 산악지대로 옮겨 온 헬베티족(Helvetii)은 낙농으로 겨우 연명하는 한편, 외국 군대에 용병으로 팔려 나가 목숨을 담보로 가족을 지켰습니다. 거친 산악환경에서 단련된 스위스 용병들은 유럽의 각국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마침내 1505년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스위스 용병 150명을 바티칸의 근위대로 채용합니다.


  Scene #2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의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무장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군대가 주축이 된 카를 5세의 연합군은 로마를 무참히 짓밟아 버립니다. 교황청의 용병들이 모두 달아난 마당에, 500명이던 스위스 용병들만이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2만 명의 적군과 맞서 싸웁니다.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지만, 이들은 교황이 바티칸 지하의 비밀통로, 파세토 디 보르고(Passetto di Borgo)를 통하여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피신할 때까지 맹렬히 싸우다 모두 전사합니다. 이후로 바티칸의 근위대는 오로지 스위스 용병만으로 채워집니다.


    Scene #3

    1789년,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파리의 튈르리 궁(Tuileries Palace)으로 거처를 옮기고 스위스 용병 1,000명을 왕궁 근위대로 세웁니다. 1792년, 분노로 가득 찬 혁명군과 시민들이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 갈 때, 프랑스 근위대는 모두 도망가고 스위스 용병들만이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황제, 루이 16세를 끝까지 지킵니다.

© 오주현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가운데 하나인 카펠교와 함께 루체른의 상징이 된 빈사의 사자는 루이 16세를 지키다 죽어간 용병들을 기리어 182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사자가 죽어가면서도 앞발로 지키고 있는 방패의 백합은 부르봉 왕조의 문장(紋章)이고, 그 옆의 다른 방패는 스위스의 국장(國章)이 새겨져 있습니다. 죽음으로써 지켜야 했던 "신의"와 "명예"를 상징합니다. 돈을 받는 대가로 목숨을 바치기로 했던 약속을 저버린다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겠지만, 후손들은 용병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알프스의 산속에서 추위와 맞서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을 겁니다. 용맹히 싸워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면, 스위스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고,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도 인정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히틀러조차도 득(得)보다 실(失)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에 스위스는 건드리지 않았죠.


    헬베티(스위스)의 충성과 용맹을 뜻하는 라틴어 HELVETIORUM FIDEI AC VIRTUTI와 함께 튈르리 궁의 용병들에게 헌정된 사자상 아래에는 프랑스혁명 그날의 전투를 기리며, 760(DCCLX) 여 명이 전사했고 350(CCCL) 여 명이 생환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자는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사자는 스위스인들의 마음속에 살아서 스위스를 지키는 정신이 되었습니다. 비록 1859년 이후로 스위스인들의 외국군대 취업이 금지되었지만 (교황청은 예외입니다), 사자는 조상들의 피로 일구어 온 스위스의 역사를 오늘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 오주현

    그래서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빈사의 사자를 품고 있는 저 화강암을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바위"라고 썼습니다.

사자는 자신의 갈기를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은신처에 드리웠다. 그는 절벽의 살아있는 돌에서 깎아낸 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자의 크기는 웅장했고, 그 자세는 고귀했다. 그 어깨에는 부러진 창이 꽂혀 있는 채, 사자는 고개를 숙이고서 그 앞발로 프랑스의 백합을 지키고 있었다. 절벽에 드리운 덩굴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절벽 위에서 맑은 샘물이 흐르다 저 아래 연못으로 떨어져 내렸다. 수련이 핀 연못의 부드러운 표면 위로 사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졌다. 이 곳은 소음과 복잡함과 혼란에서 떨어져 차분한 숲의 구석에서 보호받고 있다. 이 사자가 죽어갈 곳으로는 예쁘장한 철제 난간을 쳐둔 소란스러운 광장의 화강암 받침대가 아니라 이곳이 걸맞았다. 루체른의 사자는 어디에 있던 인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만큼 그의 모습이 인상적일 곳도 없으리라.

- 마크 트웨인, 유럽 방랑기(A Tramp Abroad), 1880 (나무 위키의 번역)

    사자를 세 번째 만난 것은 몇 해 전 12월 초하루였습니다. 기온은 낮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붉은 낙엽들이 사자의 정신을 기리며 활활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촛불 같은 모습으로 사자상 주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조금은 다른 사진을 찍고 싶어서 벽돌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카메라 뷰파인더 속 사자의 외침이 연못을 건너와 바닥을 울렸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살고 있는가?





아래 링크는 같은 매거진, "내 마음의 길"의 이전 글입니다.

https://brunch.co.kr/@6901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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