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방법
꿈꾸던? 아니 솔직히 말해 조급했던!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전역 이후 제대로 된 월급을 한번 가져다준 것도 없는데, 웃음 지으며 넥타이를 매어주는 아내가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웠다.
“아! 이 얼마 만에 출근다운 출근인가!”
넥타이가 목을 심각하게 조이긴 했지만 이게 바로 슈트의 매력 아니겠는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급하게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신임 동기들과의 만남도 한 껏 기대했건만 이건 웬 걸! 참석 대상자가 나 하나뿐이지 않는가!!
알고 보니 지금까지 회사에서는 단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었던 특채 채용을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었고, 모집인원 역시 단 1명이었는데 그 합격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었다.
또 한 번 놀라야 할 무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엘리트 집단인 전략기획팀에 내가 편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SKY 출신들이 모여있는 엘리트 부서에 유일무이한 체대 출신의 특수부대 요원이라니...
이미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어야 했는데,
‘회사가 나를 제대로 알아봐 주는구나’
하며 착각속에서 나오지 못한 내가 한심할 따름이다.
시작은 좋았다. 회사 내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 부서에 근무한다는 자부심도 생겼고 무엇보다 팀장님이 잘해주셨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팀장이 지독한 악마 같은 사람이니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전혀 그럴만한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부서까지 손수 인사도 시켜주시며 친절히 대해주셨고, 어딜 가든 보디가드처럼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든든해 하셨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지나치다 싶은 면도 있긴 했다. 다른 선배들이 한창 바쁜데도 불구하고 내게는 꼭 정시에 퇴근하도록 독려하셨고, 일찍 퇴근하게 되는 날이면 회사 비서실장님까지 부르시며 함께 저녁식사도 하고 항상 술도 사주셨던 점이다.
“몸도 반듯하고, 항상 밝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회사에서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인재가 될 거야!”
도대체 나의어떤 면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든 과분한 칭찬이 항상 듣기 좋았을 뿐이었다.
업무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이럴 마케팅이라는 업무가 생소했기에 이해되지도 않았고, 보고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도 못한 상태였음에도, 꾸중은 커녕 격려를 받고 있으니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가 처음인 만큼 관리 차원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잘 도와주고 있는 것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가 개봉되었다.
진정한 회사생활이 어떤 것인지 처절히 느끼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자리가 이루어졌는데, 팀장님은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조용히 나를 따로 불러내어 물으셨다.
“혹시 아버님이..... 맞지?... 우리 회장님이 아버지 맞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미리 눈치를 채고
“그런 거 까지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지켜봐 주십시오”
라고 센스있게 눈치껏 둘러댔다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대우받으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마냥 순수했던 나는
“예에?!! 팀장이 무슨 말씀이세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무슨!! ㅎㅎ 착각하신 거예요! 제가요? 절대 그릴 리가 없죠! ”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황하신 팀장님의 표정이 말해주듯, 모든 착각의 실마리는 풀어졌다.
이제껏 특채 채용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회사에서 처음으로 특채를 채용했다. 그것도 사원도 아닌 대리 직급으로 말이다! 나만 몰랐을 뿐이었다. 이미 회사 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내 이름의 성씨와 회장님의 성씨가 같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기가 막힌 스토리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사실 내 잘못은 전혀 없음에도 마치 대역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약 1달간의 파라다이스는 이렇게 내게 안녕을 고했다.
억울하신 팀장님은 진정한 악마가 어떤 것인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왜 팀원들이 진자부터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야 완벽하게 알 것 같다.
매일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했으며, 일부러 그러시는 건지 꼭 지하철 막차시간이 끊기고 나서야 퇴근을 하게 하셨다.
무엇보다 업무시간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는데, 잔 심부름을 시켜서 해가기라도 하면 일부러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기 일수였고, 보고서는 있는 자리에서 찢기거나 내게 던져졌다. TV에서나 보아왔던 그 비굴한 장면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이렇게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어쩌다 모두가 조금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하셨는데 이때부터 모든 계산은 언제나 나의 몫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정말 지옥이었다, 넥타이는 나를 죽이려는 족쇄로 변했고, 정장은 마치 수의와 같았다. 수면시간도 충분하지 않은 데다가 움직이지도 않고 하루 종일 업무 하는 척 의자에만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몸무게는 100kg에 육박했으며, 퇴근 후 억지스러운 술자리까지 참석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불규칙한 생활로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항상 피곤에 찌들어 아무런 목표도 의지도 없는 무기력한 삶만 계속 반복될 뿐이었다.
그 중 가장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한 내 잠재력을 활용 하기에는 전혀 다른 생소한 분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회사 내에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나의 미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암담했다. 다른 팀원들만 보더라도 남모르게 모두 이직만 준비할 뿐, 회사에 대한 어떤 자부심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군인의 삶을 살았던 내게 목표의식과 주인의식, 애국심(자부심)들이 내 삶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면 지금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전의를 상실했다. 어떠한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또다시 사랑하는 내 가족들을 시궁창으로 내 보낼 수 없기에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낸 건지 어느날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역시 여자의 직감이 너무나 무섭다.
“맞지도 않는 일로 너무 힘이 들면 그냥 그만두어도 돼. 우리가 뭘 하더라도 먹고는 살겠지! 그러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게 더 문제다!”
사실 지금의 나는 긍정의 아이콘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낙천적으로 살고 있지만, 언제나 우리 아내가 나보다 한수 위였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마도 어릴 적부터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자라온 이유인 듯싶다.
아내의 위로의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와 딸을 뻔히 보이는 지옥 같은 상황으로 또다시 밀어 넣어야 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긍정의 답변으로만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내 자신이 죽일 만큼 한심하고 쓰레기 같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때 아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중에 돼서야 알게 된 그 답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그냥 자기를 믿었던 것 같아!”
이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만든 우리 아내의 신뢰의 힘이다.
온갖 핑계를 대며 하루아침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지금 나의 장점 중 하나가 일단 한번 결심하면 절대 미루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인데, 아마 이때부터 과감한 결단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집과 아내 집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사정이 안 좋으신 건지, 아니면 정신 못 차렸다고 생각한 아들 때문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반반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단칼에 거절하셨고, 장인 장모님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차라리 미리 말했어야 하는 후회도 있다. 나중에 어차피 도움받게 될 줄 알았으면 말이다.
가장 힘들 때 옥석이 가려진다고 해야 하나? 한 때 잘 나가던 놈이 이 지경이 되다 보니 사람이 가려지기 시작했다. 나뿐이었다면 차라리 감당할 수 있었을 텐데 나 때문에 아내와 딸 모두가 주위사람들로부터 그런 사람 취급을 받고 무시당하는 걸 보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아마 이때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을까?
진짜와 가짜의 모든 인간관계가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동안 알고 지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아내는 이런 상황에서 조차도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씩씩한 척 오히려 나를 위로했지만 그 말은 내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 뿐이었다. 진짜와 가짜가 가려지며 모든 인간관계가 제로화되고 보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아무에게도 신경 쓸 일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다시 내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여기었다.
다시 백수가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고 있던 그때, 평생을 함께 하고싶은 존경하는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회에서 처음 만나게 된 형님은 같은 대학 ROTC 선배로, 대기업 임원이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성부터 능력까지 모두에게 존경받는 정말 훌륭한 분이셨다.
형님은 나의 모든 사정을 이미 들으셨고,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시고자 본인이 설립한 작은 회사에 일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감사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너무 감사함 마음에 이전 회사를 그만두게 된 본질적인 이유를 망각하고,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또다시 조급하게 달려들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저 조금이라도 벌어 볼 조급함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시키면서 현실이라는 벽에 또다시 주저앉게 만든 것이다.
언제나 최고라고 자부했던 나는 이렇게 현실에 굴복하고 말았다. 시야는 좁아졌고 이성적인 판단은 더 흐려졌다.
여전히 어떠한 꿈과 목표도 없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긴 방황의 늪에 허우적 되며 누군가가 구해주기만을 바라고만 있었던 것이다.
희미해진 판단력으로 그것이 생명줄인줄 착각하며, 나는 그 줄을 또 잡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