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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May 29. 2022

태어나서 처음으로 - 2. 천사들의 도시는 개뿔

23살, 난생처음 홀로 떠난 교환학생

https://youtu.be/aXZ_DX99LMY

이 날의 기록이 담긴 영상




비행기에서 화이트 와인 몇 잔을 먹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는 조승우 님이 나오는 영화 <클래식>을 보고, 또 잠이 들었다.


밀린 잠을 자고 나니, 미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허리를 조금 곧추세우며, 창 밖을 보니 땅이 보였다. 야자수가 보이는 것에 아이처럼 두근거렸다. 몰래 작은 박수를 쳤다.


내려서 무섭지 않은 척 입국 심사를 하니 이제 좀 엘에이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왜 J1 비자를 받았냐고 몇 번이나 무섭게 물어보는 공항 직원, 비자 인터뷰를 보러 간 대사관과 비슷한 분위기의 공항, 생각 외로 많이 멀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던 코인라커까지.


그래서 그냥 교환학생들을 만나기 전까지 공항에 쭉 있을까 하다가, '미국까지 왔는데 두려운 것도 해보자'라는 생각에 공항 밖으로 나왔다. 우버를 부를까 했는데, 인터넷이 너무 느려서 앱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냥 걸어보기로 했다. 비록 난 캐리어가 두 개지만, 그 정도야 뭐. '걷다가 힘들면 쉬고, 아니면 뭐 돌아가지'하는 안일한 생각도 함께 떠올리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냥 바보다.


캐리어 끌고 헉헉대면서 한 30분을 걸었다. 캐리어 2개 끌고 차가 씽씽 달리는 길을 걸으니까 사람들이 쳐다봤다. 가끔 차들이 멈춰서 태워주냐고 물어봤다. 혹시 나 걸인 같았나....?

마음 같아선 멈춰 선 차를 타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그냥 마저 걸었다. 친구들이 저 앞에서 날 기다린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충분히 쳐다볼 만했다. 애초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 동네고, 공항 근처라 인도가 잘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것도 모르던 나는, 캐리어를 한 손에 하나씩 끌고 밀면서 욕을 해댔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의 나라라더니 하나도 안되어있고 말이야! 차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고! 이게 무슨!"

중간에 택시를 부르려니 괜히 지는 느낌이었다. 엘에이와 나의 싸움 같았다. 이를 꽉 깨물고 "세현아 할 수 있어!"를 혼잣말로 되뇌면서 마저 걸었다.


그때는 신기했던 랄프스

드디어, 사람들이 좀 많고 마트가 있는 동네에 이르렀다. 길에 앉아있던 홈리스가, "칭챙총!"이라고 소리쳤다. 유튜브에서 인종차별 영상을 보면서, '난 진짜 욕을 해줘야지'라고 다짐한 것과 다르게 바닥만 보고 걸었다. 상대는 눈이 풀리긴 했지만 건장한 남성이었다. 아직 이 동네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주한 그 남성은, 일단 인종으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무모한 짓을 했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 더 큰 두려움을 주었다. 이 남성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리고 이곳의 경찰은 나를 보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난 이 사회의 외부인이고, 도움을 준대도 내가 어떤 형태에서든지 상처를 받은 이후에 사후 처방적인 대처만 할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적확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자, 아무도 날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무거운 캐리어와 한 개의 텅텅 빈 백팩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나를 지킬 어떤 무기도 없었다. 생명을 지키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캐리어 손잡이 둘을 꽉 잡고, 그저 빠르게 지나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 무기력했다. 내가 외부인이라는 것이, 여성이라는 것이, 약하다는 것이.



건물을 누끼 따서 하늘을 합성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지나치고 나서는 길이 또 예뻐서, 가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난생처음 보는 하늘색이었다. 멈추면 그렇게 덥지도 않았다. 획-하고 부는 짧은 바람에도 땀이 금방 식었다. 이 근방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은 또,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어줬다.

아까는 사람 때문에 무서웠는데 지금은 선글라스를 썼더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웃어주는 캘리포니안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의 웃음으로 나도 1초라도 웃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희망도 서서히 피어올랐고 말이다.









라커를 못 찾고 그 근방을 빙빙 돌았다. 길에 있던 경비원 복장을 입으신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Are you looking for that?"

그 말을 하며 그 할아버지는 경계심에 조금 경직된 표정을 한 나에게도 친절히 웃으며, 라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그제야 조금 안도한 나는 아직 서울 사람으로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못 거는 그 습성을 유지한 채로 답했다.

"Oh yes. Thank you so much."

교과서에서 배운 말을 그대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두려움에 조금 얼어버린 뇌는 역시 세뇌당한 말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캐리어를 들고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곳으로 들어갔다. 라커는 생각보다 작았고, 생각보다 비쌌다. '캐리어를 두 개 넣으려면 라커를 두 개 예약해야 하나, 생각보다 많이 비싼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나갈까 고민한 사이,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친절한 웃음으로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아, 어쩔 수 없다. 온 김에 하나만 짐을 맡겨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캐리어를 하나만 안 들고 다녀도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체력과 감정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일단 하나의 라커만 빌렸다. 캐리어를 하나 넣은 라커에는 생각보다 공간이 남았다. 그 공간에 다른 캐리어도 넣으려고 했는데, 내가 낑낑대며 밀어 넣어봤자 다른 캐리어는 넣을 수 없었다. 결국 난 아쉬워하며 두 번째 캐리어를 꺼냈다. 땀을 닦으며 짐을 빼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직원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조금 경계했으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힘을 쓰더니 두 캐리어를 한 라커에 넣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Wow!"

직원은 웃으며 다행이라고 화답했다. 고맙다고 또 교과서에서 배운 말을 하며 가게를 나왔다.



사진만 평화롭던 스타벅스

라커 가게를 나오자마자 스타벅스로 달려갔다. 땀을 흘린 만큼, 상큼한 무언가를 마시고 싶었다. 에이드를 한 잔 시켰다. 직원이 이름을 물어봤다. 나는 교환에 와서 내 영어 이름으로 쓰려고 한, 회사에서 쓰던 닉네임을 말했다.

"It's Serena."

가십걸이라는 유명한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으니, 다들 쉽게 알아듣겠거니-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Serena? Aren't you Asian?"

'.... 뭐라고?'라며 되물을 뻔했다. 세레나인 것도 맞고 아시안도 맞아 이 자식아. 아시안이면 그런 이름 쓰면 안 되나? 뭐라는 거지 이 사람?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화를 내야 하냐? 아니면 무시해야 하나? 그렇다고 답해야 하나?

"And?"

결국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조금 모르는 척, 조금 화난 척 애매하고 안전하게 답하는 일이었다.

"I mean, for me, Serena isn't yellow."

꽤나 괜찮게 답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의도와는 정 반대되는 답이 되돌아왔다. 허탈했다. 얼빠진 것처럼 서 있을 수는 없으니, 그 사람 이름을 보고 말했다.


"Jason? Are you like little Hitler or something?"

"You are being mean. Stop it. Your drink will be out in a minute. Have a good one."

그 사람은 당황한 듯 웃으며 갑자기 내가 짓궂은 장난이라도 친다는 듯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곧이어 나온 그 음료에는 심지어 'Sarina'라고 쓰여있었다.




하루도 안 된 시간 속에서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울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경비원 할아버지와 라커룸 직원 같이 친절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두려웠고 화가 났던 순간들에 지배당한 후였다. 내가 좀 다른 인종인 게 뭐 어떻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단일민족적인 사회에서 주류로 살던 나에게는 처음인 일이었다. 주류와는 정 반대인, 첫눈에도 외부인으로서 앞으로 수 없이 이런 일을 마주해야겠지. 답답했다. 천사들의 도시는 개뿔. 천사에 대한 모욕이다 이건.


어쨌든 내 이름조차 불러주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편한 말로 편히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다. 이건 묘한 해방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는 일이다.

생각을 할 수 있는 말로 다듬어서 의기소침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두렵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렇게나 말한다고 생각하면 자유롭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용기가 생겼다. 욕을 조금 했다. 이 씨, 너희들이 뭔데, 어? 혼자 욕을 하곤 조금 미소 지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조금 지질하게 분노를 풀면 되려나.


욕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떤 아저씨가 와서 말을 걸었다. 자기가 부인과 애기가 샌디에이고에 있다고, 근데 지갑을 도둑맞았다고 했다. 핸드폰도 없어 부인에게 연락할 수도 없다고 했다. 결론은 본인 버스비를 미리 결제해주면 자기가 계좌로 보내주겠다는 건데, 안쓰러워 보여서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줄 뻔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럼 왜 전화를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돈을 달라고 했을까 싶다. 그렇지만 당황스럽고 안쓰러운 마음이 겹치면 그런 논리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타지라 겁을 먹어서, 그리고 나는 실제로 돈을 받을 계좌도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에 좀 걸렸다.

그 아저씨는 샌디에이고에 갔을까?


나중에 탄 택시 아저씨 말에 의하면 외지인한테 하는 흔한 사기라고 했다. 그런 방식을 변주해서 다양한 사기가 이 지역에 많다고 했다. 쉽게 전화도 빌려주면 안 된다고 했다. 핸드폰을 들고 도망가거나, 번호가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고. 위험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마음이 좀 놓였다. 진짜 힘든 사람을 외면한 건 아니라는 자기 위로와 함께.

그렇지만 곧이어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 사람은 그런 방식의 사기로만 생계가 유지되는 걸까? 상대를 의심하게 되어 쉽게 도와줄 수도 없는 세상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서로를 불신하고,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사기로 의심받는다.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를 건설했다고 믿는데,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할 수는 없는 사회가 탄생했다는 것이 조금 슬펐다.


LA를 천사들의 도시라고 말한 사람은, 리조트에서 수영만 하다 돌아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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