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앞, 아이의 속도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가을은 마치 나무들의 축제 같았습니다.
각자의 색을 지닌 잎사귀들이, 햇살과 바람을 머금으며 서서히 빛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붉음이 초록 위로 번져가고, 노란빛 잎사귀는 햇빛 속에서 한층 더 선명하게 반짝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가 살짝 기울며, 잎사귀들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는 듯 흔들립니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이 마치 계절이 건네는 속삭임 같아, 나도 모르게 창밖에 시선을 오래 두게 됩니다.
가을이 이렇게 깊어갈 즈음, 현관문이 ‘철컥’ 하고 열렸습니다.
“엄마!”
아이의 목소리가 집 안 가득 터져 나왔습니다.
얼굴엔 땀이 번들거리고, 숨이 가쁘게 오르내립니다.
현관에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음료수를 꺼내 꿀꺽꿀꺽 들이킵니다.
붉어진 볼과 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
휘날리는 두 팔이 마치 단풍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처럼 생기 넘칩니다.
“엄마, 있잖아요! 집에 오는 길에 그 내리막길 알죠? 신호등 앞에 자동차 속도 알려주는 거요!
“레이더 속도 표지판!”
“응, 알지. 왜?”
“그거요! 나랑 친구들이 진짜 열심히 달렸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속도가 안 나오는 거예요!
우린 완전 번개처럼 달렸거든요. 근데 숫자가 하나도 안 떠요! 고장 난 거 아닐까요?”
엉뚱한 말에 그만 웃음이 터졌습니다.
조용하던 가을의 오후가, 아이의 목소리에 한순간에 환해졌습니다.
그런데 웃음도 잠시.
“그리고… 신발 한 짝 잃어버렸어요!”라며 아이가 씩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다가 벗겨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자동차가 와서 못 찾고 그냥 왔어요.
근데 엄마, 내일 더 많은 친구들이랑 같이 달리면 속도 나올까요?”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상상에 또다시 웃음이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 가을을 느끼며 잠겨 있던 생각도, 하루의 고단함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가끔은 아이의 엉뚱한 한마디가 삶의 무게를 슬쩍 내려놓게 해 줍니다.
그 웃음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배우고,
평범한 하루에도 작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단풍잎의 붉음도, 은행잎의 노란빛도
아이처럼 저마다의 색으로 오늘을 물들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엄마로서, 한 사람으로서
나만의 색을 천천히 덧입히며 하루를 빛내봅니다.
다음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로 바람에 비스듬히 누운 작은 신발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제 아이가 잃어버렸다고 했던, 바로 그 신발이었습니다.
차를 멈추고 다가가 그 신발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습니다.
작고 가벼운 그것은, 아이의 하루가 얼마나 치열하고 생생했는지를
묵묵히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을 고이 마음속에 담았습니다.
가을빛 속에, 아이의 웃음과 숨결, 그리고 작고 소중한 속도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엉뚱한 말이 뜻밖에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 작은 말과 웃음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낍니다.
오늘의 속도는 숫자로 남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빛나는 기록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