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10

by 송생님



오랜만에 한강을 가보니 인터넷에서만 보던 러닝크루가 정말로 실제했다. 그 규모는 산책하는 사람보다 뛰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좁은 인도를 한 줄로 걸어 다녀야 할 만큼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각기 뛰는 속도가 다른데 뭐 하러 같이 뛰는 걸까? 8시에 이촌한강공원에서부터 반포까지 뜁시다, 약속했지만 막상 저녁을 먹고 나니 7시부터 뛰고 싶어질 수도 있고, 동작대교쯤에서 멈추고 싶을 수도 있을 텐데.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같은 속도와 거리를 뛰는 일은 너무 불편스러운 일이 아닌가.

많이 뛰지는 못하지만 나도 러닝을 좋아한다. 베트남에서 헬스장이 잘 되어있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아침마다 세수도 안 하고 뛸 수 있다는 점은 러닝을 습관으로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러닝머신에서 뛰면 일정한 속도로 -혹은 원하는 속도로- 뛰기에 편하다. 비가 와도, 날이 더워도 뛰고 싶을 때 뛸 수 있다는 점도 좋은 점이다. 그런 실내 러닝이 익숙해지니 밖에서 뛰기가 겁이 났다. 온실 속 화초가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오르막길을 만나면 금방 멈춰버리고 싶을 거 같았다. 기록도 지금처럼 안 나올 텐데.. 잘 못 뛴다는 사실을 기어이 깨쳐버리면 영영 안 뛰고 싶지는 않을까. 취미조차도 잘 통제된 상황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성향 탓이기도 했다. 이런 내 얘기를 한참 듣던 그 사람은 바깥에서 뛰면 무엇이 좋은지 설명해 줬다.


"매일 같은 동네를 뛰어도 매일 풍경이 달라. 그게 되게 재밌어. 물론 신호등 때문에 멈춰야 하기도 하는데, 바깥에서 뛸 때 느껴지는 바람이 너무 좋아. 바람 덕분에 생각보다 기록도 잘 나와."

"비 오면 어떡해? 비 오면 못 뛰잖아."

"못 뛰는 거지 뭐"


풍경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며 에어팟도 끼지 않고 달린다는 그는 마치 인터넷 짤로 떠도는 3대 광인(여행 끝나자마자 가방 정리하는 사람,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 에어팟 안 끼고 러닝머신 뛰는 사람) 중 하나와 흡사해 보였다. 그래도 그 모습을 보며 바깥에서 뛰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름 방학을 맞아 발리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해변가에서 러닝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첫 번째 행선지였던 스미냑에서는 일몰이 너무 예쁜 탓에 저녁마다 뛸 시간이 없었다. 해변가에 앉아서 빈땅맥주를 곁들여 멍을 때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있곤 했다. 모래 바닥이라 신발 신고 뛰기도 별로였어. 맞아, 내 말이. 다음 행선지였던 사누르는 발리를 가로질러 스미냑과는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그러니까 일몰이 대단치는 않은 조용한 지역이었다. 강릉 커피거리처럼 해변가를 따라 상점이 쭉 이어져있고, 덕분에 그 앞은 '뛰기 좋게' 보도블록이 깔려있었다. 그래 여기다! 한국이었으면 안 입었을 러닝복장을 갖추고, 해가 이제 막 지고 있는 해변가에서 몸을 풀었다. 천천히 워밍업을 하며 뛰기 시작했다. 저녁이라 생각보다 행인이 많았고, 자전거, 반대에서 뛰어오는 사람, 갈지자로 걸어 다니는 어린이들은 뛰는 내내 변수였다. 그러나 뛰는 우리에게 응원의 미소를 건네는 행인들 또한 예상하지 못한 행복이었다. 숨이 가빠서 짤막하게 나눌 수밖에 없는 단순한 대화까지도. 뛰는 실력이 영 다르지만 그 사람은 속도를 늦춰주기도 하고, 호흡을 같이 하기도 하며 나를 격려했다. 분명 3km는 뛴 거 같은데 아직이야? 정말 아직이야? 워치로 기록을 재던 상대방을 보채자 그는 이제 충분히 뛴 거 같아?라고 묻더니 3km는 진즉에 뛰었다며 웃었다. 내가 기록을 재고 있더라면 난 아마 그전에 한 번은 멈춰서 걸었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기록을 경신해 보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속도를 맞추며 뛰는 일도 그 자체로 참 즐겁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렇게 뛰었던 날을 스노클링에서 만타 가오리를 만난 순간 다음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게 되었다.

각박한 서울에 즐비하는 직장인 러닝크루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이제는 좀 이해가 된다. 서로의 호흡에 의지하여 평소라면 뛰지 않을 거리까지 뛰어가보는, 그렇게 작은 목표를 완주한 뒤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격려가 얼마나 중독적 인지도. 나도 바깥에서의 러닝을 즐겨보려고 한다, 비가 와서 뛰지 못하는 날도 더러 생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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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누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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