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산책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길은 저절로 생긴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마음이 풍족한 상태다. 앞길이 보이지 않고 막막해도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고 하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라는 다짐을 한 이후부터는 예전과 같은 '분통 터지는 감정'은 전보다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언젠가는 또 돈을 벌어야 하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전처럼 막 몸과 정신이 분리될 정도의 바쁜 삶은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바쁜 것 같이 생활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아도 막상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싶은 욕망'도 크다. 그래서 주말 동안 피곤해도 바람이라도 쐬러 어디든지 나가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그 시간 동안 여행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또한 지금의 나처럼 해파랑길을 끝도 없이 걸는다. 그러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할 정도로 삶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바뀐다. 어떤 사람은 아예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인생을 바꿔서 살아가기도 한다. 인생이 달라진다면?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모습에 놀랄 때도 있다. 나도 모르게 나만의 삶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휴식'은 가장 큰 보물이다. 쉰다는 것은 마음을 가지런히 해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나의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감각을 되살리는 역할'을 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확실히 요즘 느끼는 것은 나는 '일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무조건 하루에 조금이라도 쉬어주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사는 이유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꼭 '일을 어떻게든 해내야 잘 살 수 있는 인생의 길'로 갈 필요는 없다. 다른 길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우리 집 앞에는 9~10km 정도 되는 산책로가 놓여 있다. 이때까지 내 고향에 30년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우리 짚 앞의 해반천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추석기념으로 해서 처음부터 끝을 차근차근 걸어보기로 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걷는 것도 좋지만, 귀를 피곤하게 하면 괜히 이런저런 잡생각도 더 나는 것 같고, 괜히 몸도 무거워지는 것 같다. 생수병이 담긴 작은 가방만 어깨에 멘 채로 '걷기'에만 집중 또 집중해 보기로 한다.
요즘 날씨가 흐려서 밖에 나가기도 애매했는데 집 앞 산책로를 마음먹고 끝까지 걸어보겠다고 다짐한 그날은 가을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하늘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만큼 바람도 시원하고 햇빛이 있어도 덥지 않은 걷기에 너무나도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생각을 빼놓은 채로 길을 걷다 보면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그날 나는 걷는 동안 왜인지 모르게 '모든 것을 쉽게 나아가도 괜찮다'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겼다. 그 기운 좋은 마음이 내 머릿속과 몸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가 또다시 돌아왔다. 몸 안에 공기가 순환되는 느낌은 나의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해주고 있었다.
집 앞의 거리 10km를 이때까지 못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엔 집 앞 산책로가 10km 정도라면 5km 정도만 걷고 집에 돌아왔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걸으면서 마음 편했던 적이 별로 없었고, 가슴 한 구석에 얹힌 것처럼 속이 좋지는 않았다. 괜히 복잡한 일들,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완성시켜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걸으면서도 머리부터 지끈거리고, 어깨부터 허리, 그리고 종아리와 발바닥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는 나 자신이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숨기거나 피했던 것이다. 걷는 것이 '하루를 아주 느슨하게 게으르게 하는 존재'로 느껴지자 '하루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 압박감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바쁘게 해내고, 제대로 해낸다고 해도, 허무하게 여러 번 무너질 때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것만이 답일까? 악착같이 열심히만 살아도 되는 걸까?'
지금 '미래가 어떻게 되어도 늘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채로 집 앞에 산책로를 걷고 있는 나를 보면, 나는 과거와 지금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또다시 과거의 바쁘고, 실수투성이에, 불안감이 심해서 히스테리적인 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 어차피 세상은 끝도 없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고, 살아있는 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내가 바라던 대로 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어느 누구의 삶이든, 나의 삶이든 결국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 죽음이라는 결말.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선과 올바름'이라는 삶을 기준으로 삼아서 나의 마음을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5km 정도까지는 거의 앞과 옆, 그리고 길바닥만 보고 걷다가 언뜻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하늘이 뻥 뚫려 있었다. 아, 갑자기 아파트가 없어진, 외곽지역까지 온 것이다. 내 옆으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전거는 몇 대가 있었는데 아파트가 없는 덕에 푸른 하늘과 푸릇푸릇한 풀들 사이에 지나가는 그 모습이 자유로워 보일 때쯤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파트가 없는 모습도 보기가 좋구나.' 아파트가 없는 세상도 참 괜찮다. 지금이라도 시각을, 관점을, 환경을 달리 해본다면 또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운틴뷰나 오션뷰가 있는 카페를 하나 찾아낸 것처럼, 나만의 장소와 길을 찾은 것 같은 비밀스러운 행복감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곳을 알아내서 얼른 나처럼 행복감에 빠져있기를 잠시 바랬다.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가, 작가 루쉰은 '고향'이라는 글을 썼다. 마지막 글귀는 이랬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글귀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매번 또 읽고 내 머릿속으로도 끊임없이 기억하고, 결국 일상의 순간에 스치듯이 기억해 난다고 해도 또 잊어버릴 까봐 다시 이 글귀를 또 책을 구매까지 해서 이 글을 찾아보았다. 현재는 E북에서도 찾아 스마트폰 캡처까지 해두었다.
1920년 당시 루쉰이라는 작가가 원했던 바랬던 삶은 그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길'이었다. 언젠가는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 불평등한 세상이 아닌 모두가 평등해져 아무런 경계도 없이 대화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다가오길 바랐던 것이다. 그 길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는 '희망'이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글을 쓰고 100년 뒤 2020년 이후, 아직은 멀리 있는 꿈과 같지만, 모두가 잘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각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루쉰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길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부디 80억 명 이상의 인간 모두에게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살고 있다.
돌아오는 길. 몇 시간 동안 걷다 보니 서서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파랑길을 너무 오랫동안 걸을 때 그 증상처럼. 점차적으로 몸이 무거워지고, 평소에는 아프지 않았던 허리가 아팠으며, 어깨까지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이쯤 해서 돌아가야 하는구나.' 그리고 잠시 근처 공공 화장실을 들른 후에 몇 십분 정도 의자에 앉아서 쉰 다음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될 때쯤, 다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원래는 길이 없었어도 의미를 만들어낸다면, 그리고 그 길에 희망을 가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여전히 앞으로 천천히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또 하나의 길을 생기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