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원래 없었다
높은 빌딩도 붐비는 차들도 전부 다 버거울 때가 있다. 밀양에 위치한 시골마을이자 밀양에서 양산으로 넘어가는 길을 걷고 싶을 때 찾아갔다. 낙동강과 길만 있어도 아름다운 밀양 삼랑진. 그곳에는 작원마을(깐촌)과 낙동강 '화랑의 집'을 지나게 되면 짧은 터널(굴다리) 하나가 나온다. 이곳을 벗어나면 작원 잔도길, 낙동강 자전거길이라고 불리는 곳이 나온다. 자전거는 아직도 타기가 겁이 난다. 꿈에서는 실컷 타보았지만. 해파랑길을 걷듯이 이 작원 잔도길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걸어보기로 했다.
자전거길 옆의 낙동강과 커다란 낙동강에 비치는 산들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경치다. 그 한폭의 그림같은 낙동강과 산의 모습을 즐기면서도 나는 살짝 불안해했다. 이곳은 자전거길이면서도 자전거를 타는 바이커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약간의 떨림도 잠시, 그 떨림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뒤에서는 다양한 소리들로 나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씽씽 달리는 소리. 저 멀리서부터 자전거 폐달과 경적 소리가 나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하였다. "지나가겠습니다!"라는 씩씩한 목소리들도 들린다. 해파랑길에서 적응이 되었던 것인지 나는 재빨리 길을 비켜주었다. 일자로 걷고 있는 우리가족 옆으로 쌩~하고 지나간다. 멀리서보는 것보다 자전거는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길을 최대한 가쪽으로 비켜주면서 걸어야만 했다.
데크로드에서 나의 왼쪽으로 지나가는 바이커들을 보면 부산스러움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순간 나도 자전거 한번 타보고 싶은 욕구가 충만해진다. 하지만 걸을 때의 여유로움은 늘 경험하고 싶다. 나의 오른쪽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낙동강의 풍경 또한 놓칠 수는 없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라도 정적의 아름다움에서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느낀다면 그야말로 인생에서 최고의 경험이 된다.
사실 이곳 밀양 작원 잔도길은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떼 한양(서울)과 동래(부산)을 이어주는 간선도로 영남대로(380km)가 지나는 길이였다. 선비들에게는 과거길이면서 교통길이었을뿐만 아니라 문화적, 군사적 통로로도 다양한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옛길은 '작원잔도'라고 불리는데 일제강점기때 '경부선 철도' 건설과 함께 일부만 남아있다고 한다. 지금은 낙동강을 따라서 밀양에서 양산으로 이어지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이 지금 '낙동강 자전거길'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옛날길 작원잔도, 경부선 철도길, 현재길 낙동강 데크로드까지 총 3개의 길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잔도란 무엇일까. 잔도는 말 그대로 험한 벼랑에서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 도로를 내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잔도(棧道)' 및 벼랑길이다. 작원잔도의 모습을 보면 옛 조상의 지혜를 읽을 수 있다. 불을 내거나 자연을 최대한 파괴하는 방법인 아닌 최대한 자연을 해치지 않고 벼랑길을 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곳 천태산 고개는 꽤나 높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밀양과 양산을 잇기 위해서 낙동강변절벽을 깼고, 석축을 쌓아서 아슬아슬하지만 작은 벼랑길을 내었다. 지금의 작원잔도의 모습은 시루봉 아래에 작원 터널 아래에서만 일부 남아있다고 한다. 자칫하다가는 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저 상상이지만 잔도길을 걷는 순간 옛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길을 걸어봤지만 오래되고 낡은 길을 걸으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감이 든다. 과거 추억이 현재와 공존한다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그만큼 나도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다. 나의 과거는 많아졌고 나이가 듦에 따라 많아지고 있지만 현재와 맞닿아있다. 나는 과거와 현재가 마법처럼 하나가 됨을 느낌이 들때 한쪽 마음이 아파서 아리는 듯하다가도 다시 햇살과 같이 따뜻함을 느꼈다. 평소에는 꽝꽝 얼었던 마음 한구석이 눈이 녹듯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나는 그렇게 눈에 고이는 눈물을 참아내어 눈을 감고 걷다가 눈물이 흐를 때 다시 떴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우주의 탄생에서 우주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처음에 어떤 장소를 가면 음습하고 미스터리하면서도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는 생각에 약간의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 하지만 이곳의 정체를 알게된 이후, 완전 마음이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많은 인간들은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이 몸소 이동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편안함이 느껴졌다. 하나의 장소에 인간들의 이야기 하나만 깃들어도 '영원히 소중한 가치'가 된다. 3시간 정도 지났을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한 순간 낙동강과 자전거길은 내 눈앞에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시간은 마치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