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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애 Oct 31. 2021

중년의 소확행, 커피를 볶고 갈고 내리고 마신다.

중년의 소확행커피를 볶고 갈고 내리고 마신다.    

 

  직접 볶고 갈고 내린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고 후각과 미각뿐 아니라 온몸으로 마시고 있다. 신선하고 구수한 커피 향이 작은 서재에 가득 넘치고 내 안에는 행복감이 넘친다. 서늘한 가을 날씨와 피곤한 내 마음과 구수한 커피가 혼연일치가 된다. 피곤함이 행복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그 분위기에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켰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제목을 쓰고 또 한 모금 마시고 한 문장을 쓴다. 

  나는 커피 중독자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한 잔을 마셔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만 중독자이다. 커피에 중독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날부터였다. 아주 엄격한 가톨릭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겁이 많았던 나는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철저하게 지키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들이 못할 것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졸업 후 학창시절 때 해 보지 못한 것을 하느라 정신없는 20대 초반을 보냈다.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수녀님 말을 청개구리처럼 열심히 실천하며 즐기고 살았다. 


  그때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과 마산 창동 시내의 다방을 순회하는 것이 일 중 하나였다. 하루에 서너 곳의 다방은 기본으로 갔고 새로 다방이 생겼다 하면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다방 죽순이가 되어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몇 곳을 지정해 놓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자주 갔던 곳이 어린 왕자였다. 처음 들어가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곳이었고 촛불이 켜진 그곳에는 오래된 촛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촛농이 흘러내려 촛대 자체가 작품인 듯 한 곳이었다. 우리는 어린 왕자를 좋아했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또 마시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그때 다방에서만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니었다. 머리맡에 커피포트를 두고 눈뜨면 바로 물을 끓여 맥심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하루에 10잔 전후로 마신 것 같다. 눈뜨면서 마시기 시작해서 자기 직전에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고 심심하면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친정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하얗던 내 얼굴이 누리 팅팅해진 게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니 얼마나 커피를 마셨는지 알 수 있다. 커피믹스와 함께한 나의 20대는 결혼과 함께 막을 내렸다. 


결혼선물로 받은 필립스 커피메이커로 원두커피를 내리며 30대를 시작했다. 아침이면 커피메이커에서 떨어지는 커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어느 날 직접 커피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커피 드리퍼와 분쇄기를 샀다. 커피를 갈고 내리는 과정이 너무 좋아 그 시간을 명상이라 칭하며 그 맛에 푹 빠져 살았다. 여유로운 시간에 커피와 함께 하는 시간은 행복이었다. 앞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올해 유월 제주도 마노커피하우스에서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커피를 마신 후 커피의 신세계를 맛봤다. 다른 커피를 마시기 힘들 만큼 그 맛에 빠졌다.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이 큰 즐거움인데 게이샤 맛을 본 후 집에 있던 원두커피를 마시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한 잔에 20000원이었던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커피를 매일 마실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생두를 사서 직접 로스팅하면 어떨까 생각했고 실천했다. 첫 로스팅이라 실패할 수도 있어서 에티오피아 생두를 사서 에어프라이어와 프라이팬을 이용해서 직접 로스팅했다. 바로 볶아서 바로 갈고 내려 마셨다.     

 

  ‘와우! 신선하고 구수하고 깔끔한 이 맛, 혼자 마시기 아까운 맛이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커피만 신세계가 아니었다. 비싼 생두가 아니었는데도 게이샤 못지않은 맛이다. 바로 볶아서 내려 마시니 신선함과 구수한 맛은 어떤 커피에도 비유하지 못할 독특한 맛이다. 두 번째 생두는 좀 더 가격이 나가는 코케허니 생두를 사서 볶았다.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나만의 방법은 뜨거운 김이 한소끔 빠진 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신다. 신선하고 구수하고 깔끔하고 내가 좋아하는 산미까지 느껴진다..     


  ‘아! 커피를 마신 후 입속에 남아있는 이 풍미!’    

 

요즘 애들 말로 대박이다. 제주에서 마셨던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커피를 좋아했던 이유가 커피를 다 마신 후 오랫동안 입안에 남아있던 커피향 때문이었다. 좋은 잎차를 마셨을 때 입안에 남아 은은한 향을 풍기는 차처럼 직접 로스팅한 코케허니가 그랬다. 입속에 오래 코케허니 향을 남겼고 행복감을 상승시켰다.     

직접 로스팅한 커피 한 잔이 아이들 키울 때 느끼지 못한 여유로움을 선물한다. 중년의 소확행이 아닐까 생각하며 참 행복한 휴일 오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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