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빠 1.

by 한량을 꿈꾸며

봄이 시작되면 언제나 제일 먼저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2000년이 되면 모든 컴퓨터가 멈추고

세상의 종말이 올거라고 떠들던 그 시기.

2000년 직전 1999년에 아빠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내 닉네임이 한량을 꿈꾸며 이지만 진정한 한량은 아빠셨다.


얼리어답터 아빠는 남들 흑백티비도 잘 못보는시절 컬러티비를

제일먼저 사 놓으시기도 하셨다.

흑백 화면을 보다가 컬러를 보니 그런 신세계가 없었다.


비록 엄마와 치열한 부부싸움에 못 참고 던져버리기는 하셨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후에 우리집 컬러티비를 놓았던 자리에는

다른 컬러티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좀더 업그레이드 된 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가 같이 붙어있는 제품으로...


우리집에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남들 다 집 한칸씩 마련하던 시기에 우리집은 그 후로 오랫동안.

솔직히 지금까지 내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셨던 60년대 말 이후로 주욱~~


돈은 많이 벌지 못하셨지만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생각이 있으셨는지 저축은 저 멀리로

돈이 생기면 식구들 먹는데 진정이셨던 아빠.


컬러티비가 있던 시절 이전

내가 5살이던 75년도즈음 우리집에는 흔치않는 냉장고도 있었다.


저녁에 자고 일어나면 그 냉장고에 과일이며 음료수.

냉동실에는 아이스께끼가 가득 차 있었다.


나 5살. 동생 3살 이었던 시기라 꼬맹이였던 우리남매는

하루종일 먹어도 간식을 다 먹지 못했는데

동네 언니 오빠들 사이에 우리집에 가면 먹어보지 못한

간식이 지천에 있다는 소문이 나서 매일 놀러 왔었다고 한다.


매일와서 간식을 맛보던 언니 오빠들이 양심에 찔렸던지

뭐라도 갚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내가 5살에 한글, 숫자를 다 떼게 됐다.


놀러다는 것에 진심이었던 아빠는 어린 내손을 잡고 여러곳을 다니셨다.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인천에 다녀오던 전철에서 고깔 모양으로 만든

신문지에 번데기며 고동을 사서 쪽쪽 빨아먹던 기억이 난다.


요즘 서서갈비라는 것이 유행이던데

그 시절 우리집은 이미 종로에 있는 서서 갈비집에 다니고 있었다.

굉장히 비쌌다고 들었다.


통닭을 먹으면 일인당 닭다리 한개는 먹어야 한다는 아빠의 신념에

증조할머니까지 계셨던 우리다섯 식구는 한번에 통닭 세마리를 먹곤 했다.

만두먹기에 진심인 우리가족은 그때당시 한개 50원하는 만두 만원어치 200개를 먹기도 했다.


놀고 먹는거에 진심이었던 아빠는

남편으로서는 꽝이었다고 한다.

월급을 다 가져 온적도 없고 월급이 얼마인지 엄마는 모르셨다.


돌아기시기 직전 대략 8~9년동안 가져온 것이 다 였다.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이렇게 끝까지 책임졌던 엄마는

가장이 있음에도 가장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당시 세상에 남겨졌던 엄마의 나이쯤 되고보니

엄마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사셨는지 눈물이 난다.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살았고

사별이 아닌 이별은 생각하지도 못 하셨던 엄마는 어느새 90을 바라보고 있고

젊을적 고생으로 여기저기 망가져 온몸에 인공관절을 하고 계신다.

허리. 양쪽다리.고관절..


아빠도 고관절이 아프셔서 인공관절을 하셨다.

한량의 삶을 즐기며 살아오셨던 아빠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자포자기였다.

술을 먹기 시작했고 안주는 멀리했다.


간은 점점 망가져 갔고

얼굴은 검게 변했다.

병원에 입원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내가 첫째를 낳았을 무렵도 아빠는 같이 입원을하고 계셔서 엄마가 왔다갔다 하느라 고생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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