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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Jan 13. 2022

첫사랑을 이긴 제자의 빨간 장미

물방울이 부서지듯 가볍게 내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하니 창 밖은 어스름 밤 같다.

"야! 밖에 완전 저녁이야. 깜깜해졌다."

"와. 진짜!"

비 내리는 어두운 창 밖을 가만히 쳐다본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갑자기 첫사랑?"

오는 거랑 첫사랑의 상관관계가 도대체 무어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아이들은 이미 교과서를 덮고 턱을 괴고 앉아 이야기 듣기 모드로 자세를 잡는다.


나도 들고 있던 교과서를 내려놓고 분위기를 잡아 본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수요일이요."

"그래. 이야기에 백 뮤직이 빠질 수 없지. 선생님이 좋아하는 노래 한 곡 틀고 이야기해줄게."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 주고파

흰옷을 입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고 싶네

슬퍼 보이는 오늘 밤에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파

깊은 잠 못 이루던

내 마음을 그녀에게 주고 싶네

*한송이 어떨까

왠지 외로워 보이겠지

한 다발은 어떨까

왠지 무거워 보일 거야

시린 그대 눈물 씻어주고픈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슬픈 영화에서 처럼 비 내리는 거리에서

무거운 코트 깃을 올려 세우며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ㅡ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김범수



"비 오는 수요일이었어. 친구를 만나려고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섰어. 인도 옆으로 빠르게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고여 있던 빗물이 확~ 선생님 옷에 튀었지.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서 있던 선생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와 괜찮냐고 물으며 손수건을 건네었지."

"와. 완전 드라마다."

"좀 조용히 해. 다음 얘기 들어야 되니까. 그래서요?"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사랑에 빠졌지. 그런데 선생님 첫사랑 얘기는 여기까지만."

"아~ 선생님. 계속해주세요."

"헤어진 첫사랑 얘기 계속하다 보면 선생님 맘 아프다. 딱 좋은 기억까지만 얘기하는 걸로."

"조금만 더 해주세요. 제발요."

"수요일에 비가 오면 늘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사다 건네던 사람이어서 좀 전에 들려준 그 노래를 들으면 가끔 생각이 나. 이젠 비 오는 수요일에 장미를 건네는 사람이 곁에 없으니까. 그런데 너희들 진짜 궁금해서가 아니라 공부 안 하고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 다 알아. 얼른 교과서 다시 펴자."


종례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을 보낸 후 업무 처리를 하고 있는데 성민이가 교실로 들어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성민아, 이게 뭐야?

"이따 읽어보세요."

급히 밖으로 나가는 성민이를 뒤로하고 쪽지를 펴보니 색연필로 그린 빨간 장미 한 송이 옆에 짧은 편지가 쓰여 있다.


'선생님 진짜 장미는 지금 못 사드려요. 나중에 크면 진짜 장미꽃 사드릴게요. 사랑해요.'

이제 비오는 수요일이면 색연필로 그린 어설픈 빨간 장미와 성민이의 수줍은 편지가 먼저 떠오른다. 첫사랑을 이긴 제자의 빨간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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