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과 몇몇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이를 왼쪽 팔로 받쳐 안는다. 두 다리를 벌리게 하고 아이를 허리 위에 걸쳐 안는 방식은 더운 나라 어딜 가나 흔히 보는 풍습이다.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이에게는 가장 유리한 자세다. 곧장 젖으로 입을 가져갈 수 있으니까. 아이를 등에 업는 습관은 유럽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적어도 이집트 중기 제국(기원전 2000년) 때부터 목격된다.
아이누족과 보토쿠노스족은 아이를 등에 업고 업는 사람의 이마에 띠를 걸어 힘을 분산시키는 기술을 사용한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북극 주변 전역- 랩랜드, 핀란드, 시베리아, 북아메리카 인디언-에서는 아이를 담은 가벼운 요람을 어깨에서 허리로 비스듬히 끈으로 둘러메고 다닌다. 오스티아크와 랩랜드 여인들은 요람을 둘러멘 채 돌아다니고 일을 한다. 아이를 주머니에 담아 등에 지는 풍습은 중앙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데 주머니는 오른쪽 어깨에 둘러멘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띠나 끈을 아이 업은 사람의 가슴께에서 마주 잡아맨다. 저고리의 넓은 등판 위에 아이를 올려놓고 다니는 에스키모의 경우 양 어깨와 젖가슴에 힘이 실린다.
(앙드레 르루아 - 구랑의 설명에 따른 것)
엄마는 몸이 약했다.
첫아이를 낳고는 석달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퇴근했다. 퇴근한 아버지가 흰 와이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붙이고 갓난 딸의 기저귀를 빨았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간방에 사는 앞 집 남자가 죽었다. 그 후로 갓난아기인 나는 자나 깨나 울었다. 어른들은 그 남자의 영혼이 어린 아기인 내게 깃들어 이승에서의 녹록지 않은 삶을 대신 울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나를 업고 살았다. 밥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난 엄마의 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고단한 엄마가 나를 잠시라도 등에서 내려놓을라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불에 덴 듯 울어 젖혀서 부랴부랴 다시 포대기끈을 동여맸다. 엄마는 늘 새우잠을 잤다. 나를 업은 채 반듯이 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볼일을 볼 때도 난 엄마의 등에 업혀 있었다. 우리 집은 지붕 하나에 서너 가구가 세 들어 사는 곳인지라 아기를 맘 놓고 울게 둘 수 없었다. 난 아버지의 팔뚝과 엄마의 등으로 자랐다.
큰딸을 낳고 나도 포대기를 장만했다.
아기의 일습을 분홍으로 준비하지 않았다. 쪽빛 바다에 돛단배 무늬가 그려진 옥색 포대기였다. 호기롭게 아기를 둘러업었다. 가슴 앞에서 포대기끈을 두 바퀴 돌리고 분명히 가슴 위쪽에 야무지게 매듭을 묶었는데... 이내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아기는 내 등이 아니라 엉덩이에 달랑달랑 걸쳐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친정엄마는 깻박을 쏟아낸 것처럼 깔깔거렸다.
난 둘째 딸도 제대로 업어주지 못했다. 이번에는 잘 업었군,생각하고 우리 엄마처럼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불편해진 아기가 칭얼거리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앞으로 매는 힙시트를 사용하게 되었다.
식탁 의자에 앉은 아들이 웃통을 벗은 채 늦은 점심을 먹는다. 주방에서 분주하던 내가 무슨 생각에선지 아들의 등에 가만히 귀를 대본다. 우린 평소에 끌어안고 뽀뽀도 하며 거침없이 스킨십을 하는 모자지만 등을 통해 듣는 소리는특별하다. 우적우적 음식을 씹고 꿀떡 넘어가는 소리, 내가 묻는 말에 아들이 말하는 대답이 동굴 같은 울림으로 심장을 건드린다. 어릴 적 포대기에 업혀있던나는 엄마가 내는 일상의 소리를 이렇게 들었겠구나. 씹고 넘기고 울고 웃고 벌떡거리는 심장 소리, 온몸에 피가 도는 소리, 세포가 움직이고 흐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이 교감했겠구나. 그래서 업고 업히는 행위는 서로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더 가깝고 친하게 손잡는 일이로구나.
엄마가 나를 업어 키우며 삶을 살아낸 것처럼 한 몸, 한마음으로 난 아이들에게 그렇게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