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돌봄을 끝냈다.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막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잘하고 고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바삭거리는 낙엽길을 걸어 사무실에 들렀다.
오늘 사무실행은 매달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회의는 아니다. 5년 동안 내가 몸담았던 센터에서 퇴사하는 날이다.
작년 겨울, 8개월간 돌봄을 하던 대상자가 시설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호자는 치매가 심해지는 어머니를 더는 혼자 돌볼 수 없는 외동딸이었다.
이곳저곳 알아보더니 우리 센터가 운영하는 요양시설에 자리가 하나 났다고 연락을 받았다며 미안함이 묻은 목소리로 내게 알렸다.
어르신은 거처를 옮겼고 나의 근무 일정은 자동으로 멈춤이 되었다.
새로운 대상자를 찾기까지 센터의 다른 요양보호사들이 여행을 갈 때나 병원 진료가 잡히면 대신 근무하면서 한 달을 버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나와 딱 맞게 매칭되는 대상자가 없었다. 몇 분의 어르신이 있었지만 우리 집과 어르신의 집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기존 센터에서 매칭이 되지 않으면 집 가까운 동네의 센터로 근무지를 옮겨 매칭을 할 수밖에 없다.
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 집 근처에 있는 돌봄 대상자와 매칭이 되었다.
부득이하게 기존에 다니던 센터를 나와 새로운 센터에 적을 두고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근무했던 센터 복지사 선생님께 퇴사 처리를 부탁드리고 사직을 위한 서류를 썼다. 퇴사를 위한 과정에는 딱 15분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
가슴 깊은 곳에 점점이 물방울이 떠있다가 내려앉는 것처럼 스산하다. 생의 한 마디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마디를 만들어가는 일이겠거니 생각을 하면 허전한 마음이 조금 줄어들려나.
지난 5년의 세월이 번갯불처럼 지나간다. 친정 부모님이 편찮으셨을 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단순히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고 돌봄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인간이라면 늙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군가의 손길에 남은 생애를 맡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무거웠다. 그건 나에게도 일어날 일이니까. 그러나 하루하루 경험의 두께를 만들면서 돌봄의 일은 나의 미래를 더 촘촘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면서, 젊은 날에는 결코 짐작조차 못할 느닷없는 노년에 당황하는 어르신들, 그런 부모님을 보며 힘들어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만났다. 그들이 바로 내일의 나와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어떻게 나이 들며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돌볼 것인지 생각하면 한 개인의 일로만 밀어놓기에는 너무 무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환으로 지치고 점점 약해지는 어르신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대상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결코 힘들기만 한 건 아니다. 어르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식사와 약을 챙겨드리고 병원 동행을 하며 정이 들었다.
아이처럼 손을 잡아 드리고 한 분 한 분 추억의 말씀을 들어드리면 자연스럽게 친밀감도 생기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났다. 우리 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면서.
그저 하나의 직업으로 가 아니라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자각도 생겼다. 생의 가장 최전선에서 가장 연약한 상태의 어르신을 돌보는 일은 다른 직업과는 구별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현실은 돌봄의 일과 돌봄 노동자들을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직군으로 취급하고 있다.
어르신의 병환이 심해지거나 자녀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대상자의 자녀들은 주간 보호 센터나 요양 시설로 보내드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방문 요양보호사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버린다. 그만큼 돌봄 일은 고용이 불안한 일이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직업군이라고 말한다. 방문 요양보호사는 일 년 계약직이므로 매년 근로계약서를 쓴다. 사대보험을 적용하고 있지만 최저 시급에 가까운 월급을 받는다. 대상자 어르신과 집안일을 병행하고 마음을 챙겨드리는 일은 단순한 돌봄이 아니다. 대상자와 그 가족들과 나아가 사회 전체를 돌보는 일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 채집하는 송이버섯 채집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직업인이 아니고 송이버섯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버섯 채집인은 버섯의 품질이나 가격에 따라 생활형태가 달라진다고 한다.
바로 요양 보호의 일이 그렇다.
돌봄 일도 대상자에 따라 처지가 달라진다. 오래도록 근무하며 정을 쌓은 대상자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거나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돌봄으로 엮여있던 관계와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자리는 정리되어 버린다.
상업적 야생 버섯 채집일과 돌봄 노동은 사회보장이 되지 않는 서로 닮은 직업이다.
최근 그동안 돌봄을 하던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팔십 대 후반인 어르신은 신장 질환을 앓고 있었고 특별히 찾아오는 가족도 없는 분이었다. 많이 외로워했고 자주 볼 수 없는 자식을 그리워했다. 평소 식사도 잘 못 하고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운동도 어려워 척추도 많이 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섬망과 환상, 환청에 시달려 나를 걱정에 빠뜨렸다.
매일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텔레비전을 함께 보며 대화도 나누고 억지로 조금이라도 드시게 하려고 실랑이도 여러 번 했다. 돌아가신 엄마와 고향도 같고 말투도 비슷해서 엄마처럼 생각하며 지냈다. 하루는 어르신이 너무 아파하셔서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딸에게 연락했다.
사무적인 딸의 말투에 전화기를 손에 쥔 내 마음에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어르신은 병원으로 옮긴 바로 다음 날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어떻게든 어르신이 생의 즐거움과 애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함께 농담하고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를 딸처럼 여겨주시고 예뻐해 주셨는데.
왠지 내가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일찍 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어르신의 딸은 내게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어르신의 소천 소식은 복지사에게 전화로 들었다. 이 직업의 아픈 부분이다.
어르신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마음을 나누고 돌보는데도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가장 늦게 소식을 듣는다.
눈물이 차오르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래 아프지 않고 일찍 몸을 벗어나신 어르신을 생각하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른다.
어쩌면 요양 보호 일은 매번 이렇게 시한부의 모습일지 모른다. 돌봄도 건강도 시간도 시한부라는 사실 앞에는 차별이 없는 듯하다.
힘이 빠진다.
처진 마음을 끌어올리려 해도 쉽지 않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일.
매일매일의 불안정과 시한부라는 살얼음판을 딛고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이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다.
인생의 가장 좋은 마무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왕래하고 내 집에서 내 방식대로 일상을 계속하다가 자연스럽게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마무리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미래에는 더욱 그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부모의 좋은 마지막을 바란다면 돌봄의 인식이 더 넓어져야 한다.
돌봄 노동자를 제2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내 부모와 가족을 부탁해야 한다.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의 통로를 닫지 않는다면, 효율적인 돌봄이 가능할 것이다.
자녀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서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부모가 서로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어르신 돌봄도 보호자와 요양보호사가 이인삼각을 이루어 함께 달려야 한다.
이 일을 하면서 만나는 어르신을 남의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와상으로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는 어르신의 기저귀를 갈며 내가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배려와 효도를 이분에게 하는 거라고, 못다 한 자식 노릇을 이렇게 갚아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정말 어르신이 내 아버지로, 내 어머니로 보였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병든 어르신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자식이 되어주고 있는 돌봄 노동자들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걸음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 걸음이 사회적 시선으로 욱여쌈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져야 한다.
이 글은 2024년 10월에 작성한 글로 재구성해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