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신다.
세수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전에는 흐릿했던 눈썹 사이의 '내 천(川)' 자가 더 선명해졌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눈썹 사이에 새겨진 시냇물은 떠내려갈 줄 모른다.
붙박여있다.
내 미간의 주름을 경험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보고 나는 그걸 '성질머리'로 인식했다.
'말 안 듣는 아이가 있나?'
'집 식구들과 언성을 높이다 생겨났나?'
'조바심이나 조급함이 주름을 만들었나?'
'에고가 강한 사람인가?'
'몸과 마음에 통증이 있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생각이다.
내가 떠올린 질문은 내게도 다 해당되면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인식 안에서만 뱅뱅 돌게 되어 있다) 주름진 사람의 진짜 사정은 모르는 것이다.
안 읽히는 인문학 책을 후벼 팔 때 생긴 것이고,
몇 시간 원고를 들여다보고 흐릿한 시야를 모은 끝에 맺힌 땀방울이다.
다초점 안경을 위아래로 조절하며 문장의 의미를 캐내고 또 캐내어 내 정신에 수혈한 흔적이다.
사실 그렇다고 다 기억하고 다 알아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못해도 난 콩나물 같은 사람이니까 물 주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 노랗고 기다랗고 튼실한 결과물을 얻을 것이다.
몇 달 전,
나의 책 읽기는 주제도 없이, 목적도 없이, 입이 심심한 사람이 주전부리하듯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잡동사니 독서였다. 유행하는 웹소설이나 웹툰을 제외하고는 에세이, 소설, 자녀교육서, 시집 등 가리지 않고 그냥 읽었다.
그래선지 기억에도 마음에도 남지 않고 그냥 독서 기록만 있어서 나중에 들춰보곤 놀란다.
어, 나 이런 책도 읽었어?
이젠 코칭을 받고 체계적인 독서를 하고 있으니 더욱 몰입, 집중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아는 것을 삶으로 구현하고 싶어진다.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되려면 삶 안으로 들어와야 하니까.
축복하기가 희생의 반대듯이 창조하기가 상실의 반대다. 존재는 반드시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존재가 자신에 대한 앎을 간직하는 법이다.
p. 209.*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실을 겪는다. 내 안에 심긴 것의 정체를 모르는 우리는 우리의 완전함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축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반면, 희생은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이나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이므로 고통이나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다. (AI 개요)
본질의 손실을 감수할 수는 없다.
나에 대한 앎을 간직하는 것은 내 본질과 가능성을 계속 탐구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니까. 이는 마치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확장하듯이,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무늬와 잠재력을 드러내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내 안의 앎을 간직하기 위해서 그것의 확장을 위해서 나는 물 주기를 멈출 수 없다.
콩나물은 자라야 한다.
그러니 집중의 미간주름은 더 깊어질 것이고 나는 성장할 것이다.
주름 곁에 나란한 슬기 한 알
주름 사이에 누운 통찰 한 땀
주름 안에 새겨진 지혜 한 줄
* 기적수업, 헬렌 슈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