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막연한 생에 아무런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놓인 것들만 해치우고 목적 없이 나아갈 뿐이었다.
아무도 삶이 이럴 것이다 팁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분주한 삶을 거울삼아 내게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셨고 나는 다가오는 운명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맞닥뜨렸다. 어쨌든 살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50이 넘어 지나간 시간을 떠올려보면 어떤 기억은 내 위주로 굴절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통째로 윤색되기도 했다. 시간이 밀어내는 대로 쫓기면서 지나와보니 의식은 듬성듬성해지고 인식은 말라붙어 더욱 딱딱해졌다.
일 년 전 나를 생각하면 나는 다른 차원으로 건너온 것 같다. 갇힌 인식에서 내려와 말랑한 차원을 걷는 듯하다.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다.
차원을 넘나드는 내면의 시공간이 이상하고 새롭다.
지금 나는 흐려터졌던 삶의 자리로부터 나를 선명하게 세우고 새로워질 자리로 옮겨놓기로 한다. 딱딱한 인식을 쪼개 버리고 의식을 다시 세우기 위해 작은 일부터 해본다.
아기처럼,
어린아이처럼,
미세한 일상을 나노단위로 쪼개 그리기로 한다.
그들이 그들 안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것처럼.
매일 내 주변에 있는 살아있는 생명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 만난 생명은 가지가 잘린 벚나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무엇에 이끌리듯 벚나무 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귀에 꽂은 이어폰을 슬며시 빼 주머니에 넣었다.
나무의 목소리라도 들으려는 듯이.
가만히 보면, 잘린 벚나무는 모체인 나무와 이어져 있다.
벚나무에 누런 덩어리가 보여서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살짝 만져봤다가 깜짝 놀라 손가락을 뗀다. 벚나무도 소나무처럼 진액을 내는구나. 그렇게 자신의 몸에 난 상처에 스스로 진액을 만들어 자신을 치료하는구나.
나무 곁에 가면 나무의 품이 맡아진다.
단순히 그의 향기가 아니라 그가 내준 곁의 품, 넓은 아름드리 품에 나를 맡긴다. 나무는 커다랗고 나는 작지만 둘 다 부족함은 없다.
요즘은 생명을 생각하면 눈가가 뜨거워진다. 같은 종이 아니더라도 생명인 나와 또 다른 생명인 네가 교감하면 그냥 그렇게 된다.
가늘게 붙어있는 숨이라도 생명은 생명을 살린다. 자신의 세포를 활성화시켜 자신을 살리는 동시에 다른 생명도 받아들인다.
내 눈에는 바삐 움직이는 개미만 보이지만 수많은 생명이 벚나무를 지나갔을 것이다.
벚나무 안에 어떤 종류의 생명이 사는지 모르지만 움직이고, 꼬물거리고 가벼이 흔들리는 것들과 공생할 것이다.
상처 입고 또 상처 입으며
부서지고 또 부서지면서도
생명의 본분을 다하는 나무를 본다.
자연을 마신다.
높다란 가지 저 끝에 새들이 날아와 나무랑 같이 논다. 노랫소리 펄펄 날리며 바람과 함께 움직인다.
바람의 음률과 새들의 화음이 귓가를 간질이고
간질거리는 햇빛도 그들의 화음을 가느다랗게 거든다.
이게 일체성이지 않은가!
통일성을 보는 내 안은 아무런 동요도 일렁임도 없이, 나도 없이, 그들을 바라본다.
하나가 된다는 건 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