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T 열차를 타고 딸과 사위, 두 손자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대전에 있는 둘째에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 장난해? 내가 모를 줄 알고 슬쩍 언니네 가는 거야?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대전 내려서 나를 보고 가는 건 어때? 아니면 나 진짜 삐져서 엄마랑 안 논다!!"
둘째의 넉살에 유쾌해진 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갈세라 '비싼 엄마라 미리 예약해야 하거든'이라며 조용히 답변한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흥미로운 도장 깨기가 된다. 딸들이 여기저기 살아서 여행처럼 들르는 맛이 있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관계의 간격은 서로에게 여유와 틈을 준다.
두 손자가 커가는 모습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젊을 때 어린 내 아이들을 키운 차원이 1차원이었다면, 사춘기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던 부모 자리는 2차원, 결혼한 자녀가 낳은 아이들과 나누는 시간들은 3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굉장히 입체적이면서도 깊은 세계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초등 1학년 둘째 손자가 마구 떼를 쓰길래 마주 보고 앉아서 연설을 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먼저 듣고,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형이 얼마나 곤란한지,
네가 싫은 건 형도 싫은 것이니 싫어도 규칙은 지켜야 한다는 둥.
잉잉 울며 내 말을 듣던 손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더 크게 울었다. 하...
아, 나는 손자의 마음도, 눈높이도 모르고 훈계를 했으니... 얼마나 웃기던지!!
(할머니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리고 재밌다)
아이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 여러 가지다.
형이 애지중지했던 물건을 몰래 책가방 속에 넣어 학교에 가져간 둘째 손자. 친구들에게 보여준다고 우쭐거리며 자랑하다가 그걸 달라는 친구에게 홀랑 주고 돌아온 동생을 용서한다는 첫째 손자.
딸과 사위는 그런 첫째에게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화가 나면 동생에게 화를 내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첫째는 동생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고, 속상하지만 그 물건이 동생보다는 소중하지 않다고 한다.
뭐지, 이 녀석?
손자들은 자기 생각에 솔직하다.
집에서는 제 엄마의 목소리가 아빠보다 더 크다거나, 아빠가 어깨깡패를 만들려고 커다란 덤벨을 들고 웃기는 포즈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흉내내며 늘어놓는다. 나도 함께 거들며 풀어놓는 이야기에 손자들은 동시에 방바닥을 구르며 웃는다.
손자들이 말한다.
할머니가 달라졌다고!
옛날에 무섭고 혼내던 할머니가 더 작아지고 더 부드러워졌단다. 지들이 훌쩍 자라서 그렇다는 건 모른다. 지들이 나와 말이 통하고 통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는 사실은 모른다. 함께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눠서 그렇다는 건 모른다.
손자들은, 만나면 사랑하려고 준비된 선수들 같다. 할머니를 안으려고,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려고 준비된 자세로 요잇땅, 한다.
내가 실수해도 사랑한다.
내가 못마땅해도 결국은 사랑해요! 하고 헤어진다.
때로 나는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들과 헤어진 다음 조용히 뒤에서 부끄러울 때가 있다.
할머니가 품어야 할 아이들인데 거꾸로 내가 손자들의 품에 안긴다.
내 아이들과는 이런 입체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이들과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었고 더 깊이 있게 관계에 대해 탐구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나의 결핍이 손자들과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만든 필수 요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과 만족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는 내가 서있는 위치가 n차원이나 무한 차원의 공간으로 넓어질지도 모른다. 손자들이 자랄 것이고 또 다른 손자 또는 손녀(이 구절에서 터지는 행복, 제발 우리에게 와 다오!)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자꾸 달라지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들이 넓어지면 나도 확장되고 그들이 깊어지면 나도 그 깊이를 함께 나누는 깊이로 나아가고 싶다.
손자들에게 사랑을 배우고 사랑으로 부끄러운 할머니지만.
*대문사진 : 향기님이 찍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