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 오전,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요.

by 캐리소

자기 자신과 노는 걸 가장 잘하는 분,

어여쁜 그분께 질문한다.


응...

오전에 제일 행복한 시간은 마당에 매어놓은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놓는 시간이었어요.

빨래 건조대가 있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에 빨랫줄을 걸고 물기도 짜지 않은 빨래를 널어놓으면 뚝뚝 떨어지는 물이 마당에 무늬를 그리고.

오후가 되면 바짝 말라 어느샌가 햇빛냄새를 몽땅 흡수한 뽀송한 빨래가 돼요.



행복을 가득 담아 말하는 그분의 표정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분의 대답을 타고 나는 과거로 돌아가 본다.


몇 년 전 내가 살던 반지하 집을 떠올렸다.

작은 마당이 있는 그 집 지하에 사는 두 가구 아이들은 합쳐서 여섯이다.

막내를 제외하고 우리 집 두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했고, 옆집은 초등 저학년 아이와 유치원생 두 아이까지 고만고만한 세 아이를 키우는 집이었다.


반지하 방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보이는 작은 마당은 우리의 숨구멍이다.

빨래를 널기도 하고 나무 위를 기어오르는 아이들과 마주치기도 하는 곳이다.

성인 발자국으로는 다섯 번만에 대문에 도착하지만 그곳을 지나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


그곳이 그때는 웅크린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그때 나는 가장 빈곤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다. 현실의 내가 반지하에 살았대도 정신의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금의 나를 한치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도 지금도 내 처지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이 달라졌다.



빈곤을 가장 안전하게 방지하는 길은 내면의 부, 정신의 부를 쌓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부는, 그것이 우수함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료함이 만연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퍼올려도 마를 줄 모르는 사상의 활발한 움직임, 내면세계, 외면세계의 각기 다른 여러 현상에 접하며 끊임없이 새로이 솟아오르는 사상의 유동, 시시각각으로 다른 사상의 결합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충동들 때문에, 긴장이 이완된 몇 차례의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제외하면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은 전혀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다.

-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공허에 발목 잡혀 '소박한 겸허'*라든지 '공정한 정의'* 따위를 떠올리지도 못한 시간을 살았다.


그러나 이젠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자와 빈자를 대하는 성향에 의해 야기되는 도덕 감정의 타락까지도 고찰하게 되었다.


오늘의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은?

문장을 낳느라 깨춤추던 손가락을 잠시 멈추고 그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빨래를 개던 한낮의 햇빛 아래.


그게 오늘의 행복 한 줌....







*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내부에서 경쟁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 교만한 야심과 적나라한 탐욕, 다른 하나는 소박한 겸허와 공정한 정의이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15화아름다운 것들로 충만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