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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Apr 05. 2023

버스를 기다리다 만난 벗


지난달 몇 편의 수필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김용준의 '매화'라는 수필은 넘사벽이다.

좀 따라서 써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그의 문체도 그렇지만 대상을 형상화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입히는 솜씨가 압권이다. 매화에 매혹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매화를 볼 때 아무 조건 없이 마음이 황홀해지는 걸 어떻게 하느냐며 그에 대한 자신의 아낌없는 애정과 사랑을 드러낸다.

매화가 앉은자리에서는 자신에게 곧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다고도 한다. 그의 매화에 대한 사랑에 버금갈 수는 없겠지만 내게도 애정 넘치게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

바로 나무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차창 밖 하늘은 매일 얼굴색을 달리한다. 어제는 봄빛을 받아 해사하고 저녁엔 발그레하더니 오늘은 무슨 볼멘 일이 있었는지 잔뜩 흐린 표정이다. 저어기 멀리 회색빛 하늘에 초록 무늬를 새기는 자가 있다. 항상 자기 자리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하늘의 얼굴을 비추는 건 변함없는 그다. 키가 큰 그는 떡 벌어진 위용은 아니지만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더욱 파릇하다. 오늘은 해가 설핏 숨고 비까지 뿌리니 더 간절하게 조각난 해를 향해 온 가지를 펼치고 있다. 메타세쿼이아 종류인 듯 껑충한 길이가 말없이 싱거운 오빠 같다.

그러면서도 미덥고 든든하다.



자꾸 하늘을 바라보는 일과 가만가만 나무를 쓰다듬는 시선을 가지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리고 젊은 시절에는 내 주변에 나무와 풀과 하늘과 새와 갖가지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인식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얼른 마무리해서 제출해야 하는 필연적인 숙제라도 되는 듯 감각의 스위치를 끄고 맥없이 살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었다. 주변에 공원이 인접해 있고 산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간이 정류장을 호위하듯 짙은 갈색 낙엽을 깔아놓은 평지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고 나무뿌리 근처에 풀과 작은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고요한 그 정물을 나도 정물이 되어 마주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미세한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면서 제각각의 색을 담담히 드러내고 있는 나무들과 풀과 잎사귀의 자태가 하나의 작품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무와 나무의 어우러짐, 길게 이어진 가지와 가지의 만남, 부드럽게 햇살과 만나면서 어울려 돌아가는 그들의 앙상블에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허위허위 달리느라 지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내 일상을 가만히 두드리고 어루만지는 시선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나무만 보이면 카메라를 들이대고 감탄의 셔터를 눌러댄다.

매화를 대할 때의 경건해지는 마음이 위대한 예술을 감상할 때의 심경과 다르지 않다는 김용준 작가의 문장에 내 마음도 살포시 얹어본다.




나무는 어디에 서 있든지 조화가 되고 그 조화가 어우러지는 특별한 예술이 된다. 봄에는 샘솟는 기대를 담뿍 안은 새 눈을 달고 여름에는 한 입 베어 물면 초록물이 주르륵 떨어질 듯 반짝거린다.

가을에는 더 말해 무엇하리.

나도 옛 수필가의 말투로 나무의 아름다움을 흉내 내본다. 낙엽의 다채로운 빛깔을 선물처럼 안아 들 수 있는 가을엔 웬만하면 신나게 공원 쪽으로 달려 나간다. 자신을 완벽하게 벗은 나무는 겨울 동안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하는 마법사다. 나무를 통해 새로운 벗을 만난 듯 설레고 반가운 마음을 얻었다.

이 마음으로 나무와 벗하며 오래오래 함께 지내고 싶다.

공원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나무 앞에 가 고개를 쳐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와, 아름답다.'

'세상에... '


뒤집어보면 내가 그의 곁에 다다른 게 아니라 그가 날 부르고 끌어당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느닷없이 만난 사랑이지만 언제나 동반하고 싶은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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