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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 수는 없다

by 캐리소


안에 들어앉아 있을 때는

제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를 인식하게 된 것은 아주 작은 일 하나가 깃털 같은 스침을 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이야기해 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넌 키가 작네.'

그 아이가 한 말은 이 한마디뿐입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제 안에 있는 저를 건드려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 아이의 말과 저를 바라보는 저의 인식이 서로 낯설게 만났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키 작은 아이로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의식은 아래와 위로 나뉩니다.

어릴 때 저는 수면 아래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 자신을 저로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 없었달까요?

산소가 희박한 물속에서 스크래치가 얼기설기한 수경을 쓴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이야기는 의미라기보다는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서 의미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소리로 흩어집니다. 알아채지 못한 의미는 수면 아래에서 힘없이 떠다닙니다.


어린 시절 전체가 잘 기억나지 않는 건 제게 특별한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어요. 다소 특별했다고 해도 그걸 저장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였을 겁니다.

제 안에는 무엇이 가득 들어차 있어서 제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것일까요?






중학생이었던 저는 집안의 큰딸로 남동생들의 누나로 조용하고 의젓했답니다. 단편적인 기억 속 엄마 말로는 담대하고 독한 구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가정보다는 큰아버지의 사정만 봐주고 그들의 자녀들까지 떠맡고 있던 아버지의 약한 마음이 저는 탐탁지 않았습니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던 부모님은 직원들 관리와 사업일에 바빴는데도 사정이 딱한 사람들을 집으로 들였지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엄마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저보다 두어 살 어린 한 여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곤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서로 잘 지내라고 했습니다. 여동생이 없었던 저는 내심 들뜨고 기대하는 마음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그 아이를 지켜봤습니다. 아마 어떤 아이인지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방을 쓰면서 진짜 언니동생처럼 지내고도 싶었습니다.


어느 날 방 청소를 하는데 그 아이가 개켜놓은 옷가지 안에 익숙한 물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불러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꺼내보게 했지요. 그 안에는 그동안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동전지갑이나, 손수건, 티슈나 작은 액세서리 같은 제 물건이 가득했습니다.

그 아이는 조금씩 제 물건에 손을 대고 있었어요.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지요. 그러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네가 온 곳으로 보내겠다고요. 아이는 두 번 다시 안 하겠다고 했고 일단 어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못가 다시 물건에 손을 댔지요.

그때 전 눈이 화르륵 불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의 옷가지와 짐을 챙겨 넣고 겉옷을 입혔습니다.

지갑에 지폐 몇 장을 넣어서 아이에게 쥐어주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 택시를 잡았습니다.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면 기사님께 어디 어디라고 얘기하고 그 아이를 태워 그대로 보내버렸습니다.





그 후에 제가 어떻게 했는지, 엄마는 뭐라고 하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는 있는 그대로 얘기했고 아무 말 없이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만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 아이를 보내고 저는 잠을 제대로 잤을까요?

어쩌면 처음부터 그 아이를 밀어내고 있던 저는 그 아이를 보내버릴 어떤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저도 저를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얼룩덜룩한 제 의식처럼 어떤 특정한 감정들을 애써 지운 것은 아닌지 헤아려 봅니다.


그 후로는 우리 집에 누군가 함께 기거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제가 부모님께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현했던 것 같아요.


제 안에 가득한 건 무엇일까요?

죄책감, 무심함, 인간의 잔인성, 관대하지 못함,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감정들...

무엇보다 누구 하고도 나눌 수 없는, 어쩌면 아무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아닐까요?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를 보면 공소시효가 지난 범죄를 고백하는 범인의 마음이 이럴까, 하면서 숨은 뜻의 민낯을 만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저에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납득시키고 싶은 조바심에서 써 내려가는 문장입니다.

생에 있어 이상한 경험들이 종종 있지만 저는 그 일을 '특별한'의 카테고리에 넣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정말 그 일들이 너무 커지고 특별해져서 저를 압도하고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좌지우지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제가 무엇이라고 저를 판단하겠습니까만, 평범한 저도 조금은 남다른 생채기가 있다는 걸 이해받고 싶은 것일지도요.

아, 저는 왜 이리 모르는 게 많을까요?

모른 채로도 성실하게 걸을 수 있다면 제 안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조금쯤은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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