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을 통해 그 사람을 안다.
한 사람의 눈은 어떤 사람의 눈과도 다른 고유한 것이다. 눈은 가족이 아닌 개인의 특징이어서 쌍둥이도 서로 다르다. 눈 속에 모든 이의 비밀이 들어 있다. 성격을 바꿀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눈의 표정도 바꿀 수 없다. 한 사람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다른 특징들을 결정하고 또한 그 사람을 독창적으로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눈은 독자적인 축을 선회하므로 우리가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할 수 없듯 눈 또한 마음대로 할 수없다. 땅의 축이 하늘의 축과 일치하듯, 눈의 굴대가 바로 영혼의 굴대인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 속 은이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이었다.
작은 역삼각형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갖고 있던 은이는 자신의 눈에 현재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이였다.
종종 생기 넘치는 호기심이 그 아이의 깊은 갈색 눈에 어리면 난 심연을 들여다보듯이 흥미의 더듬이를 움직여 은이의 눈을 바라보곤 했다.
끝이 닿지 않을 것 같은 투명하고 깊은 지혜가 은이의 눈 속에 있었다.
은이는 잘 웃고 잘 울었다.
맑은 은이 때문에 나는 친구라는 존재의 소중함과 특별함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 난 사람 눈을 빤히 본다고 어른들께 야단을 맞곤 했다.
누군가의 눈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비치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난 그 느낌에 빠져 곧장 공상의 세계로 진입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왜 멍하게 있니?' 혹은 '무슨 생각하고 있니?'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내 마음속 연필로 줄을 치고 네모, 세모, 동그라미 안에 눈의 주인공을 넣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눈을 보고 상상하는 것은 내 식대로 구별해 놓고 인물을 상상해 보는 재미있는 놀이였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신기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익살스러운 사람, 예쁜 사람, 미운 사람이 눈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에 눈은 내게 상상을 이어가고 공상을 확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창이었다.
그래서 오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무언가 하나를, 그것도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손가락질받을만한 민폐취미인 것이다. 청소년기가 되자 눈치 있게, 적당히 시선을 피해 상대방이 민망하지 않도록 신경 쓰게 되었다.
어느 날 A의 눈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난 건 몇 년이 지났는데 본격적으로 눈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을 가진 A는 검은 눈동자가 작았다.
검고 진한 눈 안에서 그녀의 고집스럽고 올곧은 생각이 등대의 푸른빛처럼 배어있었다.
광채가 사라진 눈에는 가엾은 영혼의 깊은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통해 마음 한켠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굴대는 '수레바퀴의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에 끼우는 긴 나무 막대나 쇠막대'를 말한다.
영혼에도 축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눈인 것이다.
내가 가진 축에 무엇을 끼우고 있나?
내 작은 눈 속에 나는 어떤 영혼의 얼굴을 새기고 있을까?
다른 건 속일 수 있어도 눈의 표정은 속일 수 없다.
눈은 수많은 표정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공포와,
사랑,
슬픔,
비굴까지.
눈은 모든 걸 담는 이야기다.
우리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
손자들이 더 어린 아기였을 때,
그들이 무언가를 바라볼 때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의 생기와 호기심이 내게도 전달되는 경우가 있었다.
커다랗고 깊은 눈에 그들을 자극하는 온갖 관심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욕구까지 퍼올리는 것이었다.
독창적인 그들의 눈은 커가면서 조금씩 그 독창성과 맑음을 소실한다. 맑음을 유지하기엔 세상이 뿜어내는 탁함이 강력하기 때문일까?
나도 내 영혼의 해맑음을 아주 많이 소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내 행위가 누군가에겐 불쾌로, 위협으로, 공포로 읽힐 수 있으니까.
A의 눈에서 바라본 영혼에는 어떤 세계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조금은 담담한 행복을 눈에 담기를 바란다.
맑은 갈색눈의 은이는 미국에 있고 그곳에서도 은이의 눈은 삶을 향해 호기심을 빛내고 있을 것이다.
오래 그 아이의 눈을 만나지 못한 나는 그립다.
은이가.
은이 눈이.
* 소로의 일기(청년 편).
제목은 소로우의 글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