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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몰입할 마음만 있다면

- 응급실에서 글 쓰던 여자

by 캐리소


지난번에 남편이 갑자기 아픈 바람에 가족 모두가 식겁을 한 사건이 있었다.

구급차에 탄 남편과 함께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글마무리를 못하고 와서 마음이 급한 상태였다.

남편 걱정, 글 걱정에 뒤죽박죽인 상태여서 무엇부터 걱정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내게 온 생각 하나.

'걱정이 해결해 주나?'

걱정이란 감정은 지금의 사태에 하등 도움되지 않을 것은 뻔한 일!


생각해 보니 남편은 응급실에 있으니 의사의 지침에 따라 검사를 하면 될 것이고, 대기하는 시간이 길 테니 나는 휴대폰으로라도 글을 쓰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로서 걱정 스위치는 끄고 행동 에너지를 가동했다.

'응급실에서 글 쓰는 여자'는 그렇게 나온 제목이다. ㅎㅎ




어떤 일이 생기면 나는 일단 머리부터 차가워진다.

최대한 신중해지려고 애쓰고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들이 유아 때였는데 그때도 남편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왜 거기에 있는지, 무슨 일인지, 얼마나 아픈지, 다친 곳은 없는지 입으로는 묻고 있지만 머리로는 아이들을 혼자 어떻게 돌보고 키워야 하는지를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계기였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한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우선되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공저 작업에 수록될 글을 수정하는 일이었고 매일 발행해야 할 브런치 글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글수정 작업과 윤문이 끝났으니 일러스트 작업이 막바지로 달려야 할 때다.

그래서 사건이 생겨도 사건은 사건대로 처리하고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일대로 진행하게 되나 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인문학을 접하고 인간과 삶에 대해 깊이 있게 숙고하면서 생의 원리와 이유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남편의 첫 번째 응급실행에서의 내 감정은 정신의 단단함보다는 불안이고 공포였다.

공포와 불안을 덮으려고 차가운 이성이 필요했다.


이번 두 번째 응급실행에서는 감정과 일을 분리할 수 있었고 감정은 감정대로 흘러가게 두었다.

정신을 세우니까 이게 가능하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한 권 두권 인문학이 쌓이니 내 안에 흐릿하던 삶의 원리가 조금씩 반짝반짝 닦여가는 것처럼 분명해진다.


인문학을 만나고 나서 그동안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했던 내 신앙의 정체도 바로 볼 수 있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달라지고 싶었다.

읽은 것을 조금씩 삶에 적용하다 보니 눈 쌓인 길을 걷듯 발자국이 생긴다.

마치 책을 읽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점검한 후에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내비게이션 같다.


남편 입장에서는 무척 괴로웠겠지만, 큰 병이 아닌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그날의 응급실행은 내가 읽은 것을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어디서든 몰입할 마음만 있다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손실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얻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집에서의 맘 편한 글쓰기와 가족의 평안을 잠시 잃었지만, 집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나의 절실함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날이다.


중용이라는 말의 의미는 가장 적절하고 잘 어울리는 것이다. 마음의 중용은 적절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알맞게 대응하고 그런 것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 어디서나 균형 잡힌 생각을 유지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고 부정적인 양상을 내버리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용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나를 아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중용을 실천하기 전에 뒤틀린 성품을 올바로 고쳐보고, 불쾌감은 빛의 속도로 잊어버리고, 담담함으로 불행에 대처하고, 고통에 대해 인내할 수 있는 근력을 키울 일이다.


작은 중용을 행동으로 보여준 내게 셀프칭찬 하나 주머니에 쏙 넣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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