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양육이라는 도구가 시간을 재료로 삼아 나를 키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다.
오만은 오만을 낳고 이해는 이해를 낳는다.
내가 미련함으로 밀고 나가면 미련함이 내 앞에 청구서로 도착하는 것을 보게 된다.
부족하고 어리석은 아이의 모습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커다란 구멍을 발견할 때.
당연히 앞에 길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가 심연 같은 씽크홀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경악하게 된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다가 나는 그 구멍을 바라보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
깊고 어두운 심연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지만,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다.
그동안 외면했던 나의 내면의 얼굴을 바라보기로 했다.
이런 순간이 아니면 결코 마주할 수 없었던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나는 점차 그 심연의 의미를 이해해 가기 시작했다. 나의 미련함이 나를 얽매고 있었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그 미련함이 스며들고 있었구나!
나의 오만함은 아이에게 적절한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넘겨진 것이다.
이해는 나의 오만함을 녹여주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 구멍을 함께 바라보자고 했다.
“이곳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을 함께 배워보자.”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그 심연을 넘어서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오만함은 종종 아이를 대하는 중에도 드러난다. 공감은 그런 경향을 바꿔준다.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이해하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 훈육해야 할 때도 있지만 뜻밖에 텀이 생겼다면 서로 떨어져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그런 틈 없이 바로 잘못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제시하고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게 해결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감정적인 반응을 접한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기 전에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 메커니즘만을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놓칠 때는 놓쳐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들이밀고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 꼭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니까.
성급함에서 벗어나, 기다리고 관찰하는 능력.
틈이 생긴 동안 난 그 능력을 키우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또 아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았으니 서로에게 유익한 놓침이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견디는 힘을 통해 아이보다는 엄마인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에는 맘에 담아 묵히고 기다리는 일을 좀처럼 하지 못했다.
성마르고 조급한 심정으로 무엇이든 내 앞으로 끌어당겨 해결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젠 꽉 틀어쥔 손에 힘을 풀고 조금씩 내려놔본다
그러면서 배운다.
모든 중심에 내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는 변방의 배경이 되어도 좋다는 것.
배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 낮아지는 마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내가 고유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나의 나됨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계기로 아이와 혹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를 더해 주는 것이었다.
배경이 되는 중에도 나는 완전함 속에 있으며 그건 핵으로서의 고유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작은 사건 안에서 내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신이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바라보는 성장의 즐거움이 전해진다.
이렇게 놓치면서 놓치는 행간의 이야기를 주워 내 마음 안에 심는 것,
놓침을 통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이해하고,
그 이야기에서 통찰을 얻는 것은 삶의 복잡함 속에서 균형을 찾는 방법이다.
그것이 진짜 놓치지 않는 법인 것이다.
이젠 다 커버려서 키울 아이도 없는 나는 나나 지속적으로 잘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