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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Sep 01. 2023

연뿌리를 배우다

"엄마, 나 사랑해?"

"응"



아들에게 받은 느닷없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앞과 뒤를 똑 따버린 나의 대답으로 녀석이 흡족할까?

매일 안아주고 매일 얼굴을 부비지만 아들의 깊은 속에선 미진하게 허기가 느껴진다.


그걸 내가 채울 수 있을까.


딸들이 어린이 시절,

젊고 철없는 엄마인 나는 아이들에게 꽉 채운 사랑을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핍, 그게 가당키나 ?'

속에 또아리같은 그릇된 견해를 진실인 양 품었던 나여.

아이들의 학습 스케줄과 친구 관계, 영양이 골고루 들어간 식사. 모든 걸 완벽하게 공급해 주면 결핍 같은 게 스며들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딸들이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나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그 애들이 피부 깊이 지녀왔을 허기를 내놓는다.


자신들의 욕구가 생략된 스케줄 관리, 무심하고 기계적인 관심, 취향을 억압했던 식탁이 곧 허기가 되었음을 내게 들려준다. 새파랗고 날 선 진실(지난 시간들이 다 허방을 짚었다는 자책이 끼어들만한)마주했을 때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탈했다.

눈에는 완벽한,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는 시간 에서 아이들의 성장과 시간이 밀도 있게 쌓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결국은 가장 사랑하는 그들을 그들답게 살도록 지 못했던 다. 오늘 따스방 필사 글에 이런 문구가 올라왔다.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분명히 읽었던 책인데도 어느 구석에 이런 문구가 있었나 눈을 부비게 된다.


내가 그들을 이끌어줄 전지전능한 신처럼 굴었다. 

사실 그들보다 더욱 청맹과니였던 나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결과다.

아이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성장으로 돕지 못한 내가 할 일은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난 존경은커녕 그들을 존중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진흙 속의 연뿌리처럼 구멍이 숭숭 나서 허허롭고 찐득한 아이들의 내면이 그걸 짐작하지도 못하는 엄마 곁에서 빠르게 휘발되고 있었다.






내가 책에 푹 빠져 몰입하고 있노라면 아들 녀석이 가만히 있다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뱃살을 쓰다듬고 내 오동통한 팔다리를 쓰담쓰담 쓸어내리고 주무른다.


아, 징그러워. 하지 마!



 정색하고 밀어낼 때 아이의 눈빛에 스치는 당혹감은 1그램 정도. 

아주 적지만, 적어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가끔은 짐짓 화난 것처럼 표정을 뚱하게 만들어 평화로운 시간을 확보하기도 한다. 그럴 때 아들의 반응이 맘을 약하게 한다.

엄마를 맘껏 만지지 못하니까 마음이 허전하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는 너를 다 충족시켜주지 못한단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꾸나.

아들은 누나들과 다르게 자기 마음과 지금의 자기 위치를 담백하게 드러낸다. 그게 다른 점이고 조금은 안심이 되게 하는 점이다. 뿌리가 썩는지, 물을 잘 흡수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기에.


연근에 뚫린 구멍으로 공기와 영양분이 넘나들 수 있다는 것. 그 구멍이 나쁜 건 아니니까. 아주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기도 하니까.

서로 조금씩 건강한 거리를 두어 연잎이 되고 연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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