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의 문 - 8화

목에 걸린 감정들

by 벙긋 웃는 문혜력

“누가 내 걱정해 달라고 했어? 사사건건 간섭하는 거 정말 별로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혜윤은 곁에 있는 사람이 여울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지장준이 집적거리던 모습까지 겹쳐 떠올라 마음은 더욱 불쾌해졌다. 어디를 돌아봐도 마음을 내려놓을 곳은 없었다. 부모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그녀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은 여울이었다.

“그렇게 여울이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수인이 붙잡고 있던 혜윤의 팔을 천천히 놓으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혜윤의 얼굴은 금세 울음으로 일그러질 듯했다.

“여울이 보고 싶은 거 알아. 나도 많이 보고 싶으니까.”

수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 말에 혜윤의 뺨을 따라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눈물이 마치 주저앉듯 멈추지 않고 고여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혜윤! 전에도 말했지만…!”

함께 소리를 높이려던 수인은 말을 끊고, 대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낮게 내뱉었다.

“네 주변도 좀 돌아보면, 조금은 나아질 거야.”

그의 시선이 다시 혜윤을 향했다. 복잡하게 흔들리는 눈빛 속엔 말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네가 뭘 알아! 여울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

혜윤은 울음을 터뜨리며 앙칼지게 맞섰다.

“모르긴 뭘 몰라! 네 짝사랑, 그거 다 알았어! 너 혼자 고백하고, 너 혼자 좋아하고, 너 혼자 다짐했던 거잖아! 여울은 그저 인류애가 넘치는 녀석이었을 뿐이야. 그 인류애가 네게 흘러간 것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혜윤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여울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거야. 그걸 다 못하고 떠난 것뿐이라고!”

말이 끝나자 혜윤은 주먹을 꼭 쥔 채 수인의 가슴을 연이어 내리쳤다.
주먹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끝내는 손바닥이 수인의 가슴에 축 늘어진 채 얹혔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수인은 그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눈빛은 억눌린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뭐, 어떻게 된 거 아냐? 소설 쓰듯 꾸며대는 거 아니냐고. 넌 주변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도 않지? 괜찮은 앤 줄 알았는데, 너 참 별로다. 네 주변의 사람들이 다 네 뜻대로 움직여야만 속이 시원해? 작작해, 서혜윤. 그리고 여울… 좋은 추억 가지고 떠날 수 있게 이제 그만 놓아줘라.”

수인의 가슴은 벌렁거리며 요동쳤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울고 짜는 혜윤의 모습이 더는 참기 힘들었다.

“야, 이 나쁜 자식아!”

기운이 빠진 혜윤은 울먹이며 수인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수인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어깨가 떨리며 그의 가슴에 닿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감는 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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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실루엣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 골목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수인은 옥상 아래 골목으로 멀어져 가는 실루엣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어서들 와. 우리 혜윤이, 수인이, 동현이, 전청이! 아줌마가 오랜만에 떡볶이 했다."

김여사가 불안했던 혜윤, 수인, 동현과 전청은 여울이 집을 도서관 삼아 그곳에 모여 시험공부를 잠깐 하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자, 김여사가 예전처럼 그들을 반겨주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신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어머니, 오늘 기분이 좋으시네요? 자주 못 뵈어 죄송합니다."

수인이 김여사에게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동현과 전청은 벌써 식탁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머니, 먹어도 돼요?"

"그러엄~. 배고플 텐데 어서들 먹어."

혜윤의 기분이 또 가라앉을 것만 같은 낌새가 보이자, 수인은 추억이 감도는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김여사에게 물었다.

"어젯밤에는 누가 와 계셨어요?"

"오긴 누가 와. 우리 여울이랑 있었지."

"네? 아아... 그러셨겠네요."

여울이라는 이름에 모두 흠칫하며 '역시... 편찮으시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네 사람이었다.

"어머니 떡볶이는 못 참지." 라며 네 사람은 옹기종기 식탁에 모여 포크를 들었다.

"생각나냐? 열 살 때 울 엄마 집 나가서 아빠랑 나랑 며칠 동안 엄마 찾으러 다니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거. 엄마도 못 찾고 아빠는 지갑까지 잃어버려서 엄청 배고팠는데, 김여사 님이 장 봐서 집 가다 우리 발견하시고 밥 먹여 준 거?"

"뭐? 엄마 집 나가신 건 알고 있었는데 밥 얘기는 처음 듣는데?"

"전청이, 그때 힘들었겠다."

"엄마가 없어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아빠 때문에 더 힘들었다, 진짜."

"아저씨 때문에? 왜?"

"엄마 훔쳐간 놈 만나면 죽이겠다고 맨날 칼을 갈았어. 근데… 그 칼이 나 먼저 죽일 것 같았다니까."

잠깐, 식탁 위에서 포크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야, 넌 뭐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뭐 어때? 다 말하고 나니까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 이제는."

남자들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혜윤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떡볶이만 꼭꼭 찍어 먹고 있었다. 포크 끝을 몇 번이나 떨구면서도 꾹 참듯 씹는 모습이 수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괜히 분위기를 흐릴까 싶어 눈길만 흘끔 주고 전청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청이 겉으로는 덜렁거리고 명랑해 보였지만, 그의 속이야기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당시 전청은 겨우 열 살이었지 않은가?

"나 무서워서 여울이네서 잠잔 적도 많아. 아침에 여울이랑 같이 학교 간 적도 있고."

"그래? 매일 여울이네 쳐들어가서 김여사를 괴롭힌 이유가 그거였구나?"

동현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분위기가 더 무거워지는 걸 막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여울이네 간다고 하면 흔쾌히 허락해 주셨거든. 그럼 난 그럴 때마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었지."

"괜찮냐?"

혜윤이 슬쩍 물었다.

“흐흐, 지금 얘기하고 나니까 조금 괜찮다. 엄마도 그렇지만 아빠가 지금까지 용서가 안 됐거든. 어린 나 앞에서 그런 공포스러운 모습을 날마다 연출하는 게 죽기보다 더 무서웠어. 그런데 나는 왜 엄마의 잘못도, 아빠의 잘못도 숨겨주면서 살아야 했냐고. 진짜 소리치고 싶었어. 애를 낳아놨으면 똑바로 살라고.”

김여사는 물기를 닦아내던 접시들을 잠시 내려놓고 전청을 바라봤다. 놀람이라기보다, 오래 참아온 아이를 향한 연민이 눈빛에 스쳤다.

“너 우냐?”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수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거든? 떡볶이가 매워서 그러는 거거든?”

“다 큰 남자가 매운 것도 못 먹는대요.”

동현이 까불었다.

“미운데, 엄마가 보고 싶다. 제길!”

전청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쓱 닦고 손을 내리는 동시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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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여기가 어디야?”

혜윤의 외마디와 함께 모두가 주위를 둘러봤다. 거실 바닥은 사라지고, 그들은 거대한 호수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화산벽이 둘러싸고, 하얀 안개가 호수 위로 천천히 피어올랐다. 잔잔한 물결은 마치 하늘을 통째로 담은 듯 푸르렀다. 백두산 천지. 호수는 신비롭고도 위엄 있게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김여사가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저 호수에 던져라.
너희들의 미움도, 아쉬움도…
그리고 덧없는 그리움까지 모두.”

전청과 동현은 순간 방금 전 거실에 있던 일을 잊은 듯, 서로를 붙잡고 감탄을 내뱉었다.
“와… 넓다! 가슴이 뻥 뚫린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여기가 정말 어디야?”

혜윤과 수인은 이미 여러 번 겪었던 시공간의 이동임에도 여전히 낯설었다. 발밑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차올랐다.

“혜윤, 괜찮아?”
“응. 너는?”
“난… 저 호수에 뭘 던져야 할까?”

대답대신 수인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를 향한 증오를 던진다 해도, 다시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은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혜윤은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여울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놓지 않을 거야. 무모한 집착이고 짝사랑이라 해도… 저 호수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라앉게 할 수는 없어. 나의 여울인걸.”

모두들 김여사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가슴 깊은 곳에 떠오르는 불편한 감정들을 선뜻 내놓기란 쉽지 않았다.

“어서. 서둘러 얘들아.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들이 너희를 집어삼켜버리게 될 거야.
마치… 저 놈처럼.”

김여사는 호수를 등지고 손가락으로 다급하게 무언가를 가리켰다.

네 사람은 그녀의 표정이 단순한 농담이 아님을 직감하고,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 사이,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수 언저리, 번뜩이는 눈빛이 그들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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