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의 문 - 9화

천지 속으로

by 벙긋 웃는 문혜력

천지를 둘러싼 고요는 순간 거짓말처럼 깨졌다.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하얀 눈발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것처럼 서늘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였다.

백두산 설화를 온몸으로 증명하듯, 황금빛과 흑갈색이 교차하는 털결이 장엄하게 빛났다. 눈처럼 희끗한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위용 있는 눈빛은 금방이라도 다섯 사람을 꿰뚫을 듯 매서웠다.

“저게… 진짜 호랑이야?”
혜윤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길을 떼지 못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인은 무의식적으로 혜윤을 앞으로 가로막으며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어깨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움직이지 마. 놈이 우리를 시험하는 거야.”

동현은 발밑의 눈을 꾹 누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설화 속 백두산 호랑이… 인간이 끝내 버리지 못한 감정들의 화신이라고 했지.”

전청은 불안한 듯 시선을 두리번거렸지만, 호랑이의 걸음에 맞춰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김여사.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호랑이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주름진 얼굴에 두려움이 아닌 강인함이 스쳤다. 그녀는 여울의 집에서 본 따뜻하지만 기억이 사라져 가는 유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저 놈의 눈빛… 슬프구나. 너희들 가슴속 깊은 곳에 놈이 침범하려 하고 있어. 피해야 돼."

네 사람에게 주의를 주던 김여사는 빠르고 카랑카랑한 어조로 녀석과 대치했다.

"그만 네 갈길로 돌아가거라!”

그녀는 네 젊은이들을 막아서서 그들을 재촉했다.

"어서, 너희들의 가슴속에 있는 돌덩이들을 저 큰 연못에 집어던지라고! 어서!"

수인도 혜윤도 동현도 전청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긴 하겠으나 어떻게 가슴속에 들러붙어 있는 감정들을 칼로 베어내듯 흔적 없이 분리해 낼 수 있는가를 몰랐다. 우선 마음의 짐이 무엇인지는 고사하고 저 엄청난 덩어리의 콧김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마블링 같은 복잡한 심경들이 무엇이었는지 조차도 망각할 판국이었다.

호랑이는 천천히, 그러나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듯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땅이 울리고, 차가운 바람이 등골을 훑었다. 녀석의 거대한 몸뚱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네 사람과 김여사의 기억 속에서, 호랑이의 존재는 단순한 맹수가 아니라 ‘감정 그 자체’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 고통이 그 큰 덩치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어머니! 어떻게 보이지 않는 존재를 연못에 던지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수인이 외쳤다. 호랑이가 천천히 그러나 점점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김여사의 코앞에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 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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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속에 뛰어들어! 빨리!"

김여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넷은 냅다 달음질을 쳤다. 김여사가 위험했다. 호랑이가 큰 입을 벌려 귀가 먹먹할 정도의 볼륨으로 허공에 울부짖자 김여사도 흠칫 뒷걸음을 쳤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김여사를 안고 백두산 한가운데로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철썩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네 사람은 감정이고 뭐고 무조건 달렸다. 동현과 전청이 먼저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수인은 혜윤을 데려가자니 바로 등뒤에서 녀석이 덮칠 것만 같았다. 수인이 혜윤의 손목을 잡은 채로 보폭을 더 넓히자 혜윤이 발목을 삐끗,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호랑이의 그림자가 허공에 뛰어오르더니 그들 위에 어둠처럼 그늘이 졌다. 순간, 아까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수인과 혜윤을 가볍게 그의 양쪽 겨드랑이에 껴안고 중력을 거스르는 속도로 연못으로 돌진했다. 첨벙!

"어흥!"

짐승의 소리가 물보라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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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울네 거실이었다. 김여사는 소파에 앉아 도롱도롱 소리를 내며 졸고 있었고 식탁 위의 떡볶이는 식어있었다.

혜윤은 제 몸을 둘러보며 놀랐다. 치마 끝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인의 손목에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동현과 전청 역시 신발이 물에 젖어 있었고, 모두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 우리가 뛰어들었는데…”
동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전청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왔네? 어떻게 된 거지?”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순간, 수인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흰 깃털이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물에 젖어 있는 듯 차갑고 가벼웠다.

“이건…”

혜윤은 숨을 삼켰다.
“어렸을 때 여울이가… 장난치면서 자주 보여주던 깃털 같아.”

거실의 공기가 묘하게 일렁였다. 아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말은 잇지 못했다. 김여사는 여전히 잠든 듯 졸고 있었고, 창문을 통해 여름 노을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혜윤이 입을 떼었다.

"그 사람... 여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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