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여울의 이름이 혜윤의 입에 올라오자, 수인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동현과 전청은 호들갑을 떨면서 난리가 났다.
"이야~ 이거 진짜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있네?"
"이것도 웹툰에 녹여낼까?"
우울한 가정사에 가라앉았던 그 전청이 어디로 갔는지, 동현과 함께 몹시 들떠 있는 모양이었다. 수인은 혜윤의 주의를 돌리려는 듯이 들고 있던 깃털을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너네 아주 그냥 잘 달리더라? 혜윤이랑 나를 버려두고 쏜 살같이 내빼데?"
"야, 네가 있는데 혜윤이는 네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작동한 거지~.
"그럼 그럼."
동현과 전청이 변명했다.
"그렇다고 치자. 김여사 님도 버렸잖아?"
"우와, 이게 무슨 소리야? 너도 혜윤이만 챙겼잖아."
"그건 그래. 수인, 지금이야."
"뭐가?"
"잍츠 타임 투 고백! 고백해, 혜윤이한테. 십 년 넘게 기다렸잖아."
수인이 딱히 저항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혜윤이 그런 수인과 장난기 어린 동현과 전청의 기대에 찬 눈을 보면서 당황스러워했다.
"야아! 너희들 그렇게 몰아가지 마. 가만히 잘 있는 사람들을 왜 엮고 난리야."
"가만히 잘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맞아, 한 사람은 누군가를 계속 그리워하고..."
"또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애를 끓이고..."
동현과 전청이 두 수인과 혜윤이 두 사람을 거실 한가운데로 몰아가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혜윤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수인은 입을 꾹 다문채 그들이 밀치는 대로 밀려 혜윤앞에 섰다.
"고백해, 고백해."
동현과 전청이 합창하듯 고백을 재촉하자 혜윤이 수인을 불편한 상황에서 빼 주고 싶어 정신을 가다듬고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 너희들도 알다시피 얘랑 나는 친구야, 너희들과 똑같은. 너무 막역해서 매일 싸우고 또 싸우는 그런 관계라고! 그니까 그만 장난쳐!"
"좋아해도 돼, 혜윤아?"
그때, 수인이 훅 들어왔다.
"우우~차수인! 남잔데?"
동현과 전청도 수인의 한 마디에 내심 놀란 눈치였다. 혜윤은 수인의 지긋한 눈과 마주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도망치고 싶어.’
얼굴이 달아 올라 숨이 막힐 듯했지만 억지로 말을 짜냈다.
"뭐라고? 나한테는 여울이 있..."
순간 수인이 혜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그는 없어."
수인의 단호한 한마디에 동현과 전청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야… 진짜 말했어?"
"이거… 장난 아니네."
두 사람의 난리법석을 무시한 채, 혜윤이 수인의 뺨을 향해 손을 날렸다. 찰싹!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가 있어? 내가 여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혜윤의 눈에 눈물이 고이자 동현과 전청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그들이었다. 수인은 한쪽으로 돌아갔던 고개를 다시 혜윤 쪽으로 향하고 말했다.
"알아, 하지만 너의 일방적인 사랑은 이제 좋은 추억으로 남겨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제 내가 널 지켜줄게."
혜윤이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보, 매일 울기만 하는구나. 실컷 울어. 오늘까지만."
동현과 전청이 흐느끼는 혜윤에게 다가가 눈치 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혜윤, 허락한 거야? 응? 수인이 오케이?"
혜윤이 눈물을 쓱 닦더니 도현과 전청을 향해 소리쳤다.
"사라져!"
그런데도 혜윤을 막아서는 그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혜윤이 주먹을 날렸다. 동현이 가슴팍을 맞았다.
"억!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힘이 세냐?"
화가 나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나서는 혜윤의 가방을 집어 들고 수인이 그녀를 따라나갔다.
"데려다주고 올게. 공부하고 있어."
혜윤과 수인이 대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동현과 전청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공부는 글렀네."
"아."
거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긴장이 빠져나가자, 동현은 김여사 옆에 털썩 앉더니 곤했는지 도로롱도로롱 코를 골기 시작했다. 전청은 말없이 바닥에 앉아, 문득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어릴 적 팽팽했던 엄마아버지 얼굴. 이젠 주름살이 생겼고 흰머리도 많았다. 강한 척 그렇게 센 척하는 그들이었는데, 더 이상 예전의 강건한 그들이 아니다. 애틋하다가 죽도록 미웠다. 죽도록 밉다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혜윤이 덧없이 여울의 흔적을 자꾸 찾으려 하는 것처럼, 자신도 돌아올 마음이 없는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를 그렇게 애증 하던 아빠는 엄마가 돌아온다고 해서 자신의 여자를 처음처럼 대할 수 있을까? 한 때, 전청은 그의 엄마가 김여사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무엇보다도 찾아오는 아이들을 거절하지 않았고 말하고 싶으면 말하게 했다. 구구절절 앞뒤 어수선한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언이 필요하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말하는 법을 알았다. 그녀는 동네 아이들의 도피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전청을 포함한 네 사람은 여울의 친구라는 이유로 그녀를 여러모로 차지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전청이 자신의 집이 두려웠다. 집에 가까워갈수록 가슴은 뛰고 도망치고 싶지 않지만 도망치고 싶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부모의 냉랭한 기운이 하루의 삶을 죄절로 마감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집에 존재하지 않는 동안은 더 심했다. 집은 쓰레기통 같았고 칼 가는 아버지는 낮에 세탁소하는 아저씨로 있는 것만 못했다. 그는 동현이 웹툰 어시를 부탁해 올 때,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집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동네에 방을 얻어서 살면서 아버지가 세탁소에 있을 때만 얼굴을 비치고 밥도 같이 시켜 먹곤 했다. 엄마 소식은 궁금했지만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세탁소 끝나고 집에 가면 혼자서 여전히 칼을 갈면서 지옥을 살고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전청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만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늙은 고집쟁이 아저씨가 비뚤어진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찌그러져 있자.'
김여사는 남편이 처음부터 없었는지 일찍 죽었는지 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동네 아이들의 대모였다. 여울은 가난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나눠주는 그런 김여사의 아들로서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될 수 있는 관심과 사랑의 분산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픈 전조현상을 보일 때도 그저 자신이 끝까지 보살필 것이라는 무언의 의지를 생활로 보여주었다. 노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학업에 대한 생각도 매우 탄력적이었다.
"공부는 아무 때나 하믄 돼." 여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짜식... 애초에 욕심이라는 게 없는 거야, 다 포기하고 살았던 거야?
전청이 물끄러미 잠든 김여사를 쳐다보았다. 코를 심하게 골기 시작한 동현이의 고개도 정면으로 돌려놔 주며 온화한 표정의 여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울은 이 집 안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