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의 문 - 12화

그까짓 것

by 벙긋 웃는 문혜력

아침 햇살이 번지는 교문 앞.
광택이 번쩍이는 검은 세단이 천천히 들어서더니 멈춰 섰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시선을 빼앗겼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내렸다.
정장 차림의 사내. 뒷문을 열어주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기사 그대로였다.

내린 이는 지장준.
가볍게 머리를 넘기며 한껏 멋을 낸 수트를 고쳐입던 그는, 스쳐 지나가려는 동현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김기사.”
그를 의식했는지 차에다 대고 일부러 큰 목소리로 짧게 부르자, 동현의 아버지가 곧장 고개를 숙였다.
“네.”
“점심시간에 내가 늘 마시는 음료. 아시죠?”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지장준은 일부러 동현의 시선을 끌고자 했다 . 마침내 원하던 대로 동현의 무리와 눈이 마주치자, 지장준은 신이 난 듯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 얘네 것도 같이요. 너희들 잠깐 목이라도 축이고...

익숙한 목소리에 동현, 혜윤, 수인, 전청 네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모았다. 지장준의 건방진 말투에 그들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지장준과 네 사람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장준의 목소리보다는 동현의 아버지 목소리에 반응한 그들이었다. 동현아버지 김기사가 지장준에게 다녀오겠다는 듯이 목례를 하자 혜윤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아저씨! 저희는 괜찮습니다.”
수인도 지장준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지장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전청까지 훑었다.
“우리 김기사를 아나 봐, 다들? 흥미로운 조합인데?”

그의 시선이 돌아 혜윤에게 가 닿았다.
“혜윤, 네가 이런 애들이랑 어울리기엔 좀 스스로 아깝다는 생각 안해 봤어? 미래가 없는 애들이잖아.”

혜윤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지만, 곧 단단히 굳어졌다. 분해서 대답을 쏟아내려려는 순간,

“장준아!”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마소야였다. 급한 듯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수인에게만 가벼운 눈인사를 하는 그녀였다.

지장준은 짜증 섞인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다시 네 사람을 훑고는, 피식 웃었다.
“재밌네. 정말.”

지장준과 마소야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무슨 말을 소곤대더니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검은 세단은 방향을 틀어 교문을 빠져나갔다.

동현의 아버지는 출발하면서, 잠시 아들을 슬쩍 바라봤다. 아들에게 미안함 같은 빛이 스쳤지만, 곧 평정심을 찾은 얼굴이었다.

동현은 그 시선을 모른 체했다.

순식간의 북새통이 사라지고 남은 건 교문 앞에 서 있는 네 사람, 동현이 흩어진 공기 속으로 씁쓸하게 내뱉었다.

"아빠가 대기업에 다닌다고 하더니, 저 모지리 놈의 운전기사였네. 나참!"

"야,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 아저씨한테 괜히 심통 부리면 나한테 죽는다."

혜윤이 오늘은 씩씩하다. 주먹을 쥐어 동현에게 겁주는 시늉을 했다.

"왜, 또 주먹 날리게?"

전청이 약을 올렸다. 수인도 질 세라 동현과 전청의 등짝을 한 대씩 갈기며 동현의 무안함을 쫓아내 주려 장난을 걸었다. "그래, 이렇게. 이렇게!" 수인이 과장된 손동작으로 철썩철썩 소리를 만들어냈다! 동현과 전청이 아프다고 법석을 떨면서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현은 작업실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전청에게 일을 맡겨놓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왔고,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우리 동현이야? 웬일이야, 올 줄 몰랐는데. 웹툰은 잘 돼 가니? 공부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너 좋아하는 치킨 시켜줄게.”

오랜만에 마주한 엄마의 환한 얼굴에 동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말문이 막히는 듯하다가 소파에 앉으며 불쑥 내뱉었다.
“엄마, 치킨은 됐고. 엄마는 알아?”

“뭘? 오자마자 엄마 안부부터 묻는 게 순서 아냐?” 주스를 내오며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미안. 근데 엄마는 알고 나만 모르는 거냐고?" 하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뭘 물어보는 건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고, 결론적으로 암것두 모른다"

엄마는 아들을 바라봤다.

"엄마, 아빠 말이야."

“동현아.” 엄마가 아들의 말을 잘랐다.

“바람피운 거나, 노름한 거 아니면… 얘기 꺼내지 마라.”

진심이야, 엄마?”

“사람은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거, 하나쯤은 있잖니.”

동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난 없는데? 엄마는 있어?”

“쫌?” 엄마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바람 같은 거야?” 동현이 살짝 궁금해져서 묻자, 엄마는 컵을 내려놓고 정색했다.
“돌았냐? 먹고 사느라 바빠 죽겠는데.”

“엄만 속 편해서 좋겠다.”

엄마는 고개를 젓고, 차분히 말했다.
“동현아. 결정적인 잘못이 아니라면… 모른 척해 주는 것도 괜찮아. 네 아빠도 열심히 살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럼 된 거지.”

동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멋있는 척하지 마, 엄마. 그건 현실도피야.”

엄마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동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네가 아는 게 뭔데 그래? 말해 봐.”

동현은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비틀며 일어섰다.
“사람은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거 하나쯤 있다며… 그거, 엄마 말 아니었어?”

엄마는 입을 다물고 아들을 바라봤다. 표정엔 궁금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알아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비쳤다.

밥 먹고 가지 않구? 왜 일어나? 가려고?”

동현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잘 있는 거 봤으니까 됐어. 시험 끝나고 아빠 있을 때 다시 올게. 아빠 쉬는 날이 언제인지 알게 되면 알려 줘.”

그렇게 말하고는 동현은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거실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엄마는 텅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좀 더 있다 가지. 지 할 말만 하고 가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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