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누구냐?
저녁 공기는 낮의 열기를 다 삼킨 듯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늘 오가던 길인데도, 오늘따라 불빛은 유난히 희미해 보였다. 가로등은 몇 개가 꺼져 있었고, 켜져 있는 불빛마저 바람에 흔들리는 듯 불안정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길은 좁지도 않고, 학생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소리가 계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붙었다.
동현은 고개를 살짝 돌려봤다. 시야 끝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그는 무심한 듯 보폭을 넓혔다.
탁, 탁, 탁—
그런데 뒤의 발소리도 똑같이 빨라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뒤에서 바짝 붙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동현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취방 쪽으로 달렸다.
쿵, 쿵, 쿵—
자신의 심장 소리와 뒤따라오는 발자국이 뒤섞였다. 등줄기가 땀으로 젖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퍽!
무언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동현은 반사적으로 발을 멈추고, 급히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엎어져 있었다.
“…뭐야, 학생?”
여학생은 황급히 일어나더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동현을 바라봤다.
“저, 저기… 혹시 작가님 맞죠? 『여울의 문』 그리시는 분!”
동현은 어리둥절했다.
“……누구지?”
“맞아요, 맞죠? 저 팬이에요. 진짜 팬!”
여학생은 숨을 몰아쉬며 두 손을 모았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 작가님을 만나면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동현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학생, 이런 시간에 이러면 곤란해. 얼른 집에 가. 늦었잖아.”
하지만 여학생은 눈빛이 반짝이며 다가왔다.
“부탁이에요. 제발 여울이 살려 주세요. 여주랑 여울이… 그렇게 끝나면 안 되잖아요. 너무 잔인해요.”
그제야 동현은 상황을 이해했다.
이 아이는 웹툰『여울의 문』의 팬이었다.
동현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작가 마음대로 바꾸는 게 아니야. 독자들이 원해도, 스토리에는 이유가 있고, 인물들의 길이 있어서….”
“안 돼요!”
여학생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동현을 붙들었다.
“여울이 죽으면… 여주는 어떻게 해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야, 이거 놔.”
동현이 황급히 뿌리쳤지만, 여학생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안 놔요. 약속해 줄 때까지 못 놔.”
동현은 진짜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발을 떼려 할 때마다 여학생이 질질 끌려가며 매달렸다.
“야! 이거 진짜 무섭다, 놔!”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검은 상하이 차림, 얼굴은 깊이 눌러 쓴 모자 그림자에 가려져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동현을 껴안듯 붙잡았다.
“으악, 이건 또 뭐야!”
동현이 몸부림쳤지만, 이미 땅을 벗어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두 사람의 몸은 공중을 스치듯 날아 자취방 앞에 내려앉았다.
“헉… 헉…”
동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살짝 동현을 내려놓더니,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본 여학생은 눈을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이게 뭐야… 꿈이야? 환상이야?”
동현은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순간,
“야, 뭐하냐 거기서?”
창문이 열리며 전청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방금 못 봤어? 나랑 같이 있던 남자! 검은 모자 쓴 사람!”
동현은 허겁지겁 물었다.
전청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 너 술 마셨냐? 무슨 소리야. 빨리 들어와. 마감해야지.”
동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의 일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시각 동현이 들어가버린 바닥에 엎어져 넋을 놓고 있던 여학생은 집을 확인하려 일어났다가 다시 나타난 검은 옷 사내에 이끌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점심시간, 학교 구내식당은 여느 때처럼 붐볐다. 접시 부딪히는 소리, 쟁반에 담긴 국물 흘러내리는 소리,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까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동현, 수인, 혜윤, 전청 넷은 한쪽 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동현은 밥을 푹푹 떠 넣으며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전청이 못 참겠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너 어제 얘기 좀 해 봐라. 진짜 누가 널 번쩍 안고 날아갔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동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괜히 사람들 앞에서 미친놈 취급 받으면 어떡하냐.”
“아니, 네가 한 얘기 그대로 옮긴 건데 뭐. 내가 과장했냐? 오히려 덜 했지.” 전청은 킥킥 웃으며 국을 떠먹었다.
혜윤이 조심스레 말했다.
“근데… 동현아, 검은 옷에 검은 모자... 나도 전에 본 적 있어.”
수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뭘 봤다는 거야?”
“옥상에서.” 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검은 옷에 모자 눌러쓴 사람이 날 올려다보고 있었어. 그때는 헛것인가 했는데… 진짜 여울 얼굴 같았거든.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수저를 놓던 동현의 손이 굳었다.
“나도 똑같았어. 얼굴은 잘 안 보였는데,그냥 그림자가 아니야. 분명히… 나를 들고 뛰어올랐다고.”
순간, 네 사람 모두 말이 끊겼다.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 주위를 채웠다.
전청이 억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야, 솔직히 우리 요즘 겪은 일만 해도 한 트럭이야. 호수에, 호랑이에, 시공간 점프까지 했는데, 이제 공중부양까지 나왔다고? 아, 신기하지도 않다 진짜.”
그 말에 다들 피식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본 적 있는 거 같아. 혜윤이네 옥상에서...가로등 불빛 사이에 모자 눌러쓴 남자가 서 있었거든. 그냥 스쳐보기만 했는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어. 오히려, 친근하달까.”
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친근했다고?”
“그래. 내가 아는 얼굴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놓였어. 이상하지?” 수인은 말끝을 흐렸다.
네 사람은 잠시 말없이 밥만 뜨다, 혜윤이 입을 열었다.
“결국 우리 셋이나 같은 사람을 본 거잖아. 그럼 진짜로 있는 사람일 수도 있네. 단순한 환영이나 착각이 아니라.”
전청은 국을 떠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네 사람이라면 이름이라도 들어봤겠지. 근데 우린 다 처음 봤다고 하잖아. 게다가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데, 그 누구도 모른다? 이상하지 않아?”
“혹시…” 혜윤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속삭였다.
“…여울이 아닐까?”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동현은 국을 휘휘 저으며 낮게 말했다.
“내가 본 건 얼굴이 가려져 있어서 확신은 못 해. 야, 그리고 여울이 무슨 예수님이냐? 부활이라도 했다는거야?”
수인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수도? 왜 우리 주변을 맴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혜윤은 수인의 말에 시선을 떨궜다. 어쩐지 마음이 울렁였다.
“만약 진짜 여울이라면… 아니면 여울이 느낌의 천사일까…”
전청이 갑자기 국을 들이켜더니, 일부러 크게 소리를 냈다.
“아, 몰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우리 그냥 밥이나 먹자. 이러다 국 식겠다.”
그 말에 셋은 긴장이 잠시 풀렸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꼭 알고싶다는 생각을 누구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네 사람이 식판을 다 비우기도 전에 구내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작가님!!!”
세상에, 어제 밤 동현을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던 그 교복 여학생, 다혜였다. 손에는 두꺼운 노트를 끌어안은 채, 눈을 반짝이며 네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순식간에 식당 안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작가님이래…?”
“누구 얘기야?”
동현은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야, 야, 미쳤냐? 여기가 어디라고—”
다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가님! 약속 아직 안해 주셨잖아요. 여울이 절대 안죽이겠다고!”
그리고는 동현 앞에 노트를 내밀었다. 빽빽한 낙서와 팬아트, 온통 ‘여울♡혜윤 해피엔딩’이라는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전청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았다.
“야, 동현아. 너 인기 많네? 팬덤 있잖아, 팬덤!”
혜윤은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 이름이 낙서 사이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야, 너희들 이 웹툰제목 뭐야. 그리고 실명을 쓰면 어떻게 해!”
수인은 팔짱을 끼고 다혜를 빤히 바라봤다.
“학생, 무슨 용건인지는 알겠는데 여긴 학교야. 시끄럽게 하면 곤란하지 않아?”
하지만 다혜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인을 가리켰다.
“맞다! 여울의 라이벌 수인이다! 맞죠? 여울 친구 수인이요? 혜윤이를 잘 지켜주세요,네? 여울과 행복해질 수 있도록!”
식당 여기저기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네 사람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동현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너 진짜 안 가? 경찰 부를까?”
다혜는 움찔했지만, 곧 다시 팔짱을 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가요. 전 작가님이 제 부탁 들어줄 때까지 못 가요. 여울은 살려야 해요!”
그때였다. 복도 쪽에서 지장준과 마소야가 들어오던 참이었다.
지장준은 상황을 훑어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뭐야 이거, 웹툰인가 뭔가 그린다더니. 팬클럽 창단식이야?”
마소야는 미소를 지으며 다혜를 한번 훑어봤다.
“흥미롭네. 어린 학생이 상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모양인데?”
그 순간 다혜가 돌연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어, 아저씨가 지장준아저씨구나! 혜윤언니 괴롭히지 마요! 안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찝적대지 말라구! 내가 다 알아!”
지장준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뭐라고? 아저씨? 야!”
마소야는 태연한 듯 웃었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얘, 누가 이런 헛소리 가르쳤어?”
다혜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폭죽을 꺼내더니, 눈 깜짝할 새 지장준 앞에서 뻥 터뜨렸다. 화약 냄새와 함께 알록달록 종이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식당 안은 웃음과 비명으로 뒤섞였다.
“야, 미쳤어!” 지장준은 얼굴이 벌개져서 뒷걸음질쳤다.
마소야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려 애썼지만 입술이 굳었다.
다혜는 두 팔을 번쩍 들며 외쳤다.
“웹툰 여주의 행복을 방해하는 자들은 내가 응징한다! 내 이름은 다혜, 여울의 문 공식 수호자!”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네 사람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혜윤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이제 진짜 평범한 학교 생활은 끝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