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의 문 - 15화

음모

by 벙긋 웃는 문혜력


진장준의 집. 언제나 그래야 하지만 재벌의 집은 으리으리한 법.

도시 외곽, 높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저택은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대문 앞에서부터 이미 압도적인 규모였다. 은빛으로 마감된 철문은 번쩍였고, 들어서자마자 드라이브웨이 한쪽에는 검은색, 은색, 흰색 고급 세단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손질된 잔디밭과 정원 사이에는 인공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분수대에서 솟구친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유리처럼 부서지며 반짝였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면, 천장이 뚫린 듯 높고 시원한 공간이 펼쳐졌다. 유리 샹들리에가 한낮의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고, 벽에는 해외 경매에서 들여온 그림과 조각들이 무심한 듯 놓여 있었다. 가죽 소파는 거실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큼직했고, 맞은편 대형 스크린은 꺼져 있어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한가운데, 지회장이 앉아 있었다. 은빛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 한 장 한 장 넘기는 신문 소리조차 기품 있게 들렸다.

지장준은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아버지 앞에 섰다. 그러나 준비해 온 말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아버지, 이번 여름방학에 특별 프로그램을 하나 운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회사 이름을 걸고, 봉사활동 형식으로요. 시골 쪽, 리조트 근처에서 진행하면 홍보 효과도 있고… 학생들에게는 장학금 혜택을 걸어주면 더 매력적일 겁니다.”

신문을 접은 지회장이 눈길을 들어 아들을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미묘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거창하구나. 봉사활동이라…”
그는 안경을 벗어 손끝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얘기한 그 여자애가 맘에 드나 보네? 네가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는 걸 보니. 맞지?”

지장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곧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모든 게 회사의 명성과 이미지를 위해서입니다.”

지회장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좋다. 하지만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특히 책임질 일 생기지 않게 각별히 신경 써라. 네가 벌이는 일이 우리 이름에 흠집을 내선 안 된다.”

그 말에 지장준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네, 아버지. 감사합니다. 김교수님께 슬쩍 운만 띄워주세요.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입가에는 음흉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며칠 뒤, 대학 본관 한쪽에 자리한 교수 연구실.
넓지 않은 방 안에는 오래된 서가와 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창가에는 화분 몇 개가 햇빛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교수의 자리에 앉은 이는 편안한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중년 남자. 지장준은 그 앞에 예의 바르게 앉아 있었다.

“교수님, 아버지께서 이번 여름방학에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일부러 ‘아버지’라는 단어를 또렷하게 발음했다.
“시골 리조트 근처 마을에서 진행하는 거고, 회사 이름을 걸고 장학금 혜택까지 약속했습니다. 다만… 모든 학생들에게 열어둘 수는 없고, 특별히 몇 명만 추천받고 싶습니다.”

교수는 의자를 젖히며 팔짱을 꼈다.
응, 아버지 얘기는 대충 들었다만. 몇 명만? 장학금까지 내건다면서?”

“예, 교수님. 보여주기식으로 수십 명을 불러 모으면 관리도 힘들고, 사고 위험도 있습니다. 저희는 철저히 관리하면서도 ‘선택받은 소수’라는 이미지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에게도, 학교에도 더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교수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흠… 네 아버지 생각이겠지?”

지장준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하지만 제가 기획안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셨고요.”

교수는 책상 위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명단을 훑던 손을 멈추더니,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지장준을 바라봤다.
“좋다, 일은 추진해 줄 수 있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얻게 되는 건 뭐지?”

방 안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지장준은 기다렸다는 듯 얇은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키홀더에는 금빛 로고가 번쩍였다.

“약소하지만, 교수님의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교수는 잠시 차 키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허… 네 놈, 여전히 대범하구나. 그래,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냐?”

“예, 교수님.” 지장준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저희 회사와 학교 모두에 도움이 될 일입니다.”

그는 예의 바른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장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준비해 온 서류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 속에는 벌써 정리된 ‘추천 희망 명단’이 들어 있었다.

“여기 보시면, 학교에서도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들이라…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잘 맞을 겁니다.”

교수는 무심히 명단을 훑어보다가, 한 이름에서 시선을 멈췄다.
“… 서혜윤? 이 학생은 장학금 받을 만 하지.”

“예, 교수님. 성실하고, 주변에도 좋은 영향력을 주는 친구입니다. 저희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과 딱 맞습니다.”

교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직접 추천하는 걸 보니… 특별히 신경 쓰는 아이들인 모양이군.”

지장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학생으로서, 좋은 학우들과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교수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지장준의 속내는 이미 충분히 드러난 셈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명단을 접어 서류철에 넣어 교수에게 건넸다.

‘혜윤… 이번엔 꼭 너를 내 곁에 두고 말 거야.’

밖으로 나간 지장준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차분히 퍼졌다.

남겨진 김교수는 한동안 책상 위의 차 키를 만지작거리다, 지장준의 뒷모습이 사라진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래… 너란 놈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으려 하지. 그게 금방 싫증나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교수의 낮은 혼잣말은 방 안에 건조하게 맴돌았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
이전 14화여울의 문  - 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