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
마을의 저녁놀은 도시의 그것과 달랐다. 하늘은 구름의 결을 따라 옥빛으로 갈라져 있었고, 논두렁 사이로 흘러드는 바람은 흙냄새와 풀잎 향을 고루 품고 있었다. 리조트에 도착한 그들의 봉사활동은 본격적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김교수는 마을회관 앞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봉사의 가치는 각자가 잘할 수 있는 걸 나누는 것”이라며 역할을 배정했다.
“아이들을 돌볼 사람, 농가 일을 거들 사람, 그리고 집집마다 불편한 곳을 손볼 사람.”
말은 단순했다. 하지만 자원자 열명 중 여섯 명은 아이들보다 땅과 노동을 택했다. 삽을 들고 논으로, 밭으로 흩어져 가는 발걸음이 오히려 신나 보였다. 그들을 앞서가는 노인들의 어깨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든든해져 있었다.
결국, 아이들을 맡은 이는 혜윤과 수인이었다.
동현과 전청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 주춤거리다가, 마을 이장의 한 마디에 황영감에게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저 둘은 손재주 있어 보이네. 집집마다 전등이나 가구 같은 거 좀 고쳐줘. 저기 황영감 댁부터 가보면 될 거야.”
"그랴? 이름이 뭐 당가? 당장 따라와 보라고!"
황영감의 가차 없는 걸걸한 목소리에 동현과 전청은 자석에 끌려가듯 영감의 뒤를 굽실대며 쫓았다.
"네, 어르신."
그들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껄껄 웃던 이장이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는 혜윤과 수인에게 말을 붙였다.
“여긴 애들이 다 조손가정이에요. 안 그래도 애들 모아놨으요. 아그들아, 나와보그라 잉.”
두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장은 아이들을 불렀고 나무그늘에 있던 아이들이 호드득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까무잡잡했다. 햇볕에 그대로 내맡겨져 뛰어다닌 탓이기도 했지만, 움직임이 둔한 노인들의 작은 손발이 되어줬겠구나 싶은 야무진 동작의 아이들이었다.
혜윤은 수인과 함께 네 아이를 맡게 되었다.
"뭐 한다냐? 어서 슨상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냐?"
"안녕하세요?"
"응, 안녕?"
아이들은 낯가림이 심한 듯 말도 없이 눈치만 보는 것 같았지만, 혜윤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웃어 보이자 곧 얼굴을 밝게 하고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망망초등학교 삼 학년 나래입니다.”
“저는 서이, 이학년.”
“민이요. 사 학년이에요.”
“저는 결이 이고요. 삼 학년입니다. 서이가 저랑 결혼하고 싶대요.”
"야, 내가 언제?!"
서투른 자기소개 중에 결이는 남자아이 특유의 장난기를 발동시켜 서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이들 안에는 묘하게 단단한 기운이 있었다. 혜윤은 아이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말했다.
“반가워. 공부한 책 있으면 가져와 줄래?”
"슨상님들, 잘 부탁 허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볼라요. 수고들 하시요."
"네 들어가십시오, 어르신."
호탕하게 사라지는 이장의 뒤통수에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수인이었다.
잠시 후, 아이들은 낡은 가방을 뒤져 공책과 문제집을 꺼내왔다. 놀랍게도 한 장 한 장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사인은 불과 며칠 전 날짜였다.
“이걸 너희들 혼자 했다고?”
혜윤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민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쌤이 있거든요. 방과 후에 학교 차 기다리는 동안 수학도 가르쳐주고, 영어로 된 역사랑 과학도 조금씩 읽어주셨어요.”
“쌤?” 수인이 되물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우리 쌤이요! 주 오일, 매일 삼십 분, 길면 사십 분! 진짜 재밌어요. 근데 방학이라 못 봐요. 아쉬워요.”
"그렇지만, 방학에도 쌤 하고 비밀이 있어요."
"야, 그걸 아무한테나 막 말하면 어떻게 해!"
서이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나래가 일침을 놓았다.
방학 동안의 쌤과의 비밀이라? 부모 대신 그 우리 쌤을 아이들은 많이 의지했나 보다 싶은 수인과 혜윤이었다.
한편, 동현과 전청은 집집마다 손볼 것이 있는지 둘러보는 임무에 맞게 황영감의 집에서 발이 묶였다.
“학생들, 전등 하나만 갈아줘 보게.”
황영감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사다리를 가리켰다.
동현이 불편한 사다리를 타고 전등을 갈았다. 거실은 순간 환해졌고, 황영감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냉장고 속 막걸리병을 꺼냈다.
“수고했으니 한 잔 해야지.”
“아, 저흰 괜찮습니다.” 전청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미 빈 잔이 탁탁 내려앉았다. 마치 거절이 예의가 아닌 듯한 기세였다. 결국 두 사람은 잔을 받았다.
황영감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자, 일단 한잔씩 받고! 캬! 거, 거시기 리조트 주인, 누군지 알아? 지 씨 놈들. 우리 동네 어른들 다 속여서 부지 몽땅 가져갔어. 잇속 챙기고는 뭐? 자원봉사? 자선행사?”
그는 잔을 비우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택도 없는 소리다. 면죄부 얻으려는 짓이지.”
동현은 난처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러나 곧 고개가 무거워졌다. 전청 역시 몇 번의 권유에 밀려 마시다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황영감과 함께 고주망태가 된 채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마주 앉은 혜윤과 수인에게 아이들은 숙제를 보여주며 뿌듯해했고, 수인은 문제집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모두 합학기 정도는 진도를 더 많이 나갔네. 우리가 친구들에게 다른 공부를 시켜줘야겠는 걸?"
아이들은 숙제를 끝내고 공책을 덮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햇볕은 아직 따가웠지만, 그들은 그늘이라곤 없는 마당에서 뛰어놀았다.
혜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수인에게 속삭였다.
“참… 씩씩하지 않아?”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혜윤이도 씩씩해줘서 고마워.”
혜윤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기 전까지는 마음이 별로였는데, 아이들을 보니 슬슬 의욕이 올라오네?"
아이들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수인의 옆모습을 혜윤이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울렸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노인들과 함께 일을 갔던 봉사자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자 강아지처럼 달려가 노동에 달련된 노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수인은 자리에 일어나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같이 온 봉사자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봉사자들 속에 섞여 있던 한 젊은이가 어깨에 걸린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쓱 닦고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어영부영 사라졌다. 햇빛을 가리려는지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 위에 모자를 덧썼다. 그의 동작은 이곳 생활에 누구보다도 익숙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모자 아래로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각도로 숙인 채 성큼성큼 리조트가 아닌 마을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수인과 혜윤이 동시에 물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수인은 대답을 흐렸다.
"그렇지, 그렇지? 나도 같은 느낌이야."
"무슨 느낌을 말하는 거야?"
그때 막걸리 냄새를 훅 풍기며 동현과 전청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