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의 문 - 19화

by 벙긋 웃는 문혜력

눈을 깜박였을 뿐인데, 공기가 바뀌어 있었다. 산의 냄새가 사라지고, 세제와 햇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허공에 떠다니던 별빛 대신, 낮게 앉은 전등 불빛과 낡은 창호지의 그림자가 방 안을 덮고 있었다.

여울의 집이었다.

거실엔 김여사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숨은 고르게 오르내렸고, 옆엔 오래된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혜윤은 그 책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서 소년은 강가의 돌을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덜 외롭도록.”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차분했다. 창틀 쪽에서 바람이 스쳤다. 거기엔 지장준이 있었다. 팔에 걸친 큰 이불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여기는—대체 어디야? 왜 내가 이걸 하고 있어야 하지?”

투덜거림에도 손은 성실했다. 빨랫줄에 이불을 넘겨 걸고, 나무집게로 집다 말고 다시 불만을 터뜨렸다.

“야, 나는 회장 아들인데—”

“쉿.” 혜윤이 책장을 넘기며 낮게 말했다. “어머니 주무셔.”

현관문이 살짝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검은 옷의 사내가 문틀에 기대었다. 모자챙 아래로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혜윤이 책갈피를 끼우고 일어섰다.

“누구세요? 대체 우리를 왜—”

사내는 대답 대신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또 한 번 바뀌었다. 그가 입은 옷의 검은색이 뉘엿뉘엿 흩어지고, 눈부신 흰빛이 그의 몸을 덮었다.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든 하얀 옷차림의 이 사내의 얼굴은 빛에 가려 윤곽만 있었다. 바라보면 볼수록 시야가 흐려졌다. 이름을 입에 붙이려 하면 입술이 굳었다.

혜윤은 목에서 말이 마르는 걸 느꼈다. “여울…?” 무심결에 새어 나온 이름. 흰 옷의 사내는 아주 미세하게 혜윤을 주목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창가의 빨래를 한번 훑어보았다. 지장준이 투덜거리며 어설프게 집게를 물려놓은 이불의 한쪽 모서리가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뻔하다가,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는데 반듯이 고쳐 물렸다. 그가 손짓도 하지 않았는데, 바람도 이불을 말리기에 적당한 정도로 순해졌다.

“봉사. 이건 당신이 먼저 고안해 낸 거잖아.” 그가 지장준에게 한 단어를 던졌다. “지금 여기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손.”

혜윤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책 앞에 앉았다. 여울의 목소리와 많이 닮아있는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거나 따뜻하기는커녕 단호하고 낯설었다. 손끝이 떨렸다. 책장을 넘기면서 혜윤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흘끔거렸다. 그러면서도 문장들은 어머니의 숨결에 맞춰 천천히 읽었다. 여울이 살아 있을 때, 늘 골랐던 책의 한 대목에 이르렀다. 김여사의 입가에 아주 연한 미소가 스쳤다.

창밖에서는 지장준의 푸념이 계속됐다. “내가 왜… 빨래까지… 아버지 회사 직원도 아니고….”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어린 시절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아플 때 집안일을 대신하던 어린 날, 엄마와 지회장이 재혼하면서 자신의 성이 바뀌었던 기억. 그때부터 고생의 ㄱ자도 떠오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 단 한 가지, 한 번도 지회장의 만족스러운 신뢰를 받은 기억이 없다는 게 스스로에게 큰 흠이었다. 그는 그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려는 듯 혀를 차고, 더 성급하게 집게를 꽂았다. 집게가 툭 떨어져 마당으로 굴러갔다. 그걸 주워 올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흰 옷의 사내. 빛이 스쳐가듯 손이 지나가자, 빨랫줄이 무게를 나눠 가지는 듯 덜 처졌다.

“뭐야….” 지장준이 웅얼거렸다. “트릭이야, 뭐야.”

"너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게 어때? 상처 투성이인 너의 마음을 이쯤 해서 만져주라고."

"네가 날 알아? 어디서 굴러온 놈이야? 힘만 세 가지고."

"그 말투부터 바꿔. 모든 사람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하는 그 태도, 그건 너 자스스로에 대한 너 자신의 비난이 밖으로 표출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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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윤은 책을 덮었다. 그가 있는 마당으로 나가고 싶었다. 김여사의 숨결은 여전히 얕고 고르게 이어졌다. 혜윤은 이불 끝을 살짝 당겨 목 언저리를 덮어주었다. 혜윤이 서둘러 마당으로 나오자 흰 옷의 사내가 꿇어앉아 흐느끼는 지장준에게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됐어. 그리고 혜윤이는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혜윤은 이 이상한 장면을 뒤로하고 다짜고짜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이 누구인지 먼저 말해주는 게 순서 아닌가요? 나를 알죠? 그런 당신은 누구인가요?"”
“만약.” 사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바람이 창살을 건드릴 때 나는 소리 같았다. “내가 여울이라면, 나를 따라 네가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 갈 마음이 있나? 마음의 준비가 됐든 안 됐든. 오로지 여울이라 하는 나를 믿고?”

혜윤은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수인이 보고 싶었다. 혜윤은 그런 자신에게 놀라면서 사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울의 환영인가요? 여울인가요?"

"나는... 여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진짜... 여울이야?"

혜윤은 여울이라는 말에 가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지장준은 여전히 땅에 쪼그리고 앉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혜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자마자, 사내는 휙—바람을 몸에 감았다. 창틀의 종이발이 살짝 들렸다 내려앉았다. 그리고 깜박, 담너머 가로등이 한 번 흔들렸다. 눈 깜짝할 사이, 공간이 다시 어두워졌다.



같은 시각, 수인은 리조트 안 마소야의 객실문 앞까지 마소야를 둘러업고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팔을 수인의 목에 감고 까마귀 울음 같은 비명을 짧게 질렀다.

“아야, 천천히! 아니, 빨리! 아니, 그냥 계속 이렇게!”

"아가씨, 괜찮으세요?"

마소야를 잘 아는 듯한 리조트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자, 수인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마소야는 내내 엄살을 부리다가, 이윽고 얼굴을 굳혔다.

"나가!" 마소야가 여자에게 차갑게 말하자 그녀는 허둥지둥 문 앞을 떠났다. 눈빛이 다시 계산의 초점을 되찾은 마소야가 명령조로 말했다.

“가지 마.” 수인의 손목이 붙들렸다. “지금 나 혼자 두고 나가면, 넌 후회할 거야.”

“마을에서 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가봐야죠.”
“장준이랑 혜윤이가 찾고 있을 거야. 네가 없어도 돼.”
“있어야 합니다.” 수인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마소야는 더 세게 잡아끌었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미세한 술 냄새와 비누 향이 섞여 올라왔다.

“차수인.”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너, 늘 누군가를 먼저 챙기지? 그게 네 장점이자 약점이야. 오늘 밤은—나부터 챙겨.”

수인은 답답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소야의 말끝이 흔들렸다. 겁에 질렸던 순간이 아직 팔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그녀는 수인을 잡아두고 싶었다. 그러나 수인의 귀에는 산에서 울리던 아이들 이름이 맴돌았다. 나래, 서이, 민이, 결이. 그리고—혜윤.

“미안합니다.” 수인이 조심히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안전은 직원들에게 맡기시고, 절 기다리지 마세요.”

그는 몸을 돌렸다. 마소야가 소파 등받이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돌아오면—후회하게 해 줄 거야.” 아이 같고 서늘한 협박에 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며 조용한 공기가 밀려왔다. 마소야는 홀로 남아 숨을 고르더니, 휴대폰을 들었다. 신속하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장난감을 잃은 아이처럼 평정과 사나움의 중간 어디에 놓여 있었다.

"야, 지장준! 너는 지금 어디야?"


외풍이 한 번 쓸고 지나간 여울의 집. 어둠이 다시 밀려오더니 산이다. 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혜윤이 어리둥절했다. 지장준이 눈물을 쓱 훔쳤다. 더 이상 혜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풀과 물, 젖은 흙의 냄새. 산의 한가운데였다.

혜윤은 숨을 고르고, 지장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은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어 다음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잠시 갈 길을 잃었다. 그때, 산자락 끝에서 누군가가 "혜윤아!" 이름을 외치며 성큼성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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