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였어?
황영감네 툇마루는 다른 집들에 비해 유난히 넓었다.
젊었을 적, 아이들을 많이 낳아 북적이며 살겠노라 마음먹고 직접 지은 집이라 했다. 실제로도 그는 여덟 남매를 낳아 키워냈고, 지금은 모두 장성하여 제 살길을 찾아 떠나버렸다. 남은 건 텅 빈 마루와 적막뿐이었다. 작년엔 평생 곁을 지켜주던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황영감에게 이 집은 허전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집을 닫아걸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허락했다. 툇마루는 자연스레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뛰노는 웃음소리 덕에 이 집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 숨 쉬었다. 황영감은 막걸리에 취해 대자로 뻗어 큰 코를 골며 자는 주사가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누구보다도 후한 어른이었다. 읍내에 나갈 때마다 사온 사탕이며 과자며 간식을 아낌없이 풀어놓았고, 아이들은 그것을 손에 쥐며 또 한 번 이 툇마루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에겐 휴대폰이 없었다. 마을 어른들의 방침이었다. 대신 뒷산과 논밭이 놀이터였고, 황영감네 툇마루가 쉼터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숨은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쌤 아세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나래였다.
“쌤?” 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인상 좋은 청년이라고 어른들이 그러셔요. 마을에 오시면 저희랑 자주 놀아주셔요.” 서이가 눈을 빛내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별자리를 알려주기도 하고, 화분에 우리 이름을 붙여서 키우게 했어요. 물도 주고, 잎사귀 닦아주고… 쌤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아이들은 입을 모아 ‘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끝마다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쌤이 단순한 방과 후 교사가 아니라, 삶에 빛을 비춰주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때 민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빠, 언니 쌤이랑 같이 만나면 참 좋겠어요. 모두 좋은 어른들이잖아요. 서로 알고 지내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요, 우리가.”
순간, 수인과 혜윤은 시선을 마주쳤다.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이 ‘쌤’이 어떤 사람인지, 왜 이토록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받는지 궁금해졌다. 혜윤의 눈동자에는 의문과 동시에 묘한 기대가 스쳤고, 수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날 아침, 황영감네 툇마루에는 아이들이 다시 모여 있었다.
아직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풀잎 냄새가 풍겼고, 아이들의 손에는 낡은 공책과 연필이 들려 있었다. 혜윤은 평소처럼 아이들의 숙제를 확인하고 있었고, 수인은 그 옆에서 책장을 함께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민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언니, 오빠! 우리 쌤이요… 쌤이 꼭 만나 뵙고 싶대요.”
“너네 쌤이?” 혜윤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네. 혜윤 누나랑 수인 형, 동현 형, 전청 형… 그리고 마소야 누나, 지장준 형까지요.”
민결이가 차례로 이름을 읊었다. 언제 요 꼬맹이가 모두의 이름을 외웠지?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혜윤은 눈을 크게 떴다. 아이들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확히 불렀다는 게 신통하게 느껴졌다.
“너희들, 쌤한테 우리 이름을 말해 드린 거야?” 수인이 낮게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만 우리 쌤은 다 알아요. 이름도 다 알고, 다들 좋은 어른들이라고. 그래서 같이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 쌤은 모르는 것이 없어요.”
혜윤과 수인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이 어떻게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또 굳이 ‘함께 만나야 한다’는 말을 전했을까. 아이들의 천진한 표정들은 그들의 만남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무한한 신뢰로 다가와 두 사람은 묘한 압박감에 가슴이 눌렸다.
그날 오후, 수인은 곧장 지장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이… 다 만나야 한다고 했답니다. 저도 밑도 끝도 없어서 말씀드리기가 뭐 했지만 아이들이 하도 부탁을 해서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지장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애들이 장난치는 거 아냐?”
“어차피 아이들에게 좋은 일도 하실 거면서, 아이들 만날 겸 한번 황영감댁으로 오시면 좋을 것 같아요.” 수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장준은 그제야 진지해졌다.
"아, 맞다! 내가 애들을 위해 공을 세우는 입장이니 얼굴 한번 보여주고 인사도 받고 그러지 뭐."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마소야를 찾아가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나 마소야는 곧장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내가 왜? 내가 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오라 가라 하라는 거야? 애들이 하라는 대로 다 들어줘야 해?”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같이 가자. 나 혼자 좀 뻘쭘하잖아.” 지장준이 떼쓰듯 칭얼거렸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교묘히 얽혀 있었다. 아이들이 부른 ‘쌤’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왜 자신들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지. 이 무주라는 동네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상한 일만 생기는 곳이었다.
"가면, 수인이도 있어?"
"아, 맞다! 당연히 있지. 걔가 나한테 오라고 연락 준 거 아니냐. 너의 미모도 뽐낼 겸 잘 꾸미고 같이 가자, 소야."
"소야라고 부르지 마. 소가 된 느낌이야. 좋아, 같이 가 주겠어. 범접할 수 없는 미모로 나를 내팽개쳤던 걸 후회하게 해 줄 테다."
그들은 각자 다른 전의를 다지며 약속일을 확인하였다.
그날 밤은 일찍 별들이 내려앉아 자리를 잡았다. 황영감네 툇마루에서 아이들과 한참을 보내고 리조트로 돌아온 수인과 혜인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피곤이 몰려와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이 들었고, 그 잠은 곧 서로 다른 꿈의 문을 열어젖혔다.
혜윤의 꿈은 낯설지 않았다.
검은 강물이 끝없이 흐르는 강가, 그녀는 여울과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러나 여울의 얼굴은 희미하게 흐려졌다. 그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뚜렷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멀어지는 듯했다. 습관처럼 다시 여울의 꿈...
“같이 가자.”
여울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번져왔지만, 혜윤은 발이 돌에 묶인 듯 움직이지 못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지만 닿지 않는 거리. 그녀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 왔다. ‘내가 알고 있는 여울이 맞는 걸까?’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수인의 꿈은 형 수영과 함께였다.
“늬들이 하던 가게 따위로 뭘 하겠다고? 결국 무너질 거야.”
그들의 아버지 차씨의 목소리는 날카로왔고, 가게 간판은 눈앞에서 부서져 내렸다. ‘차떡김라’ 간판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 앞에서 수영과 수인은 무릎이 꺾였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간판 조각을 주워 모으며 소리쳤다.
“우린… 해낼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나 차씨는 그들을 비웃고 있었고, 떨어진 간판을 부여잡은 형제의 손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동현의 꿈은 늘 불안했다.
자신이 그리던 원고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니?”
원고 속 인물들이 일제히 외쳤다. 전청, 혜윤, 수인, 심지어 여울까지. 동현은 펜을 움켜쥔 손을 덜덜 떨며 소리쳤다.
“난… 그냥…야! 이건 그저 웹툰일 뿐이라고!”
그러자 안경 쓴 소녀가 나타나서 명령했다.
"내가 쓰라는대로 스토리를 진행시키라니까요!"
그때, 원고지는 태블릿 속으로 빨려들어가 화면이 잠겨 열리지 않았고, 동현은 끝내 펜을 놓아버렸다.
전청의 꿈은 교실이었다.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창밖에서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너 같은 애랑은 안 놀아! 바보, 쭈구리, 반벙어리!”
어린 시절의 기억이 찢어지듯 몰려왔다. 그는 교실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손잡이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고립된 공간에서 전청은 이마를 박으며 되뇌었다.
“난… 혼자가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밤마다 반복되는 부모의 심한 다툼의 퍼레이드가 연속된 장면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두려움과 상실감을 견뎌내는 어린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안정이라는 것이 가득 담긴 손이었다. 전청은 얼굴을 돌려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려하였으나 어둠속에 빛 한줄기 뿐이었다.
빛줄기를 타고 창밖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놀리던 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지장준의 꿈은 이랬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웅장한 집안의 응접실이었다.
아버지 지회장이 서 있었다.
“너는 결국 아무것도 못 한다. 가진 건 내 이름뿐이지.”
지회장의 말이 메아리치면서 지장준의 발밑은 꺼져 내렸다. 끝없는 검은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그는 버둥거렸다.
“아니야! 나도 뭔가 할 수 있어! 나도…!”
그때 창문가에 흰 옷을 입은 여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지장준은 손을 뻗었으나, 여울은 단 한마디만 남겼다.
“네가 가진 건 욕망뿐이야.”
마소야의 꿈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시작했다.
수많은 관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명이 켜지는 순간, 관객의 얼굴은 모두 텅 빈 그림자였다.
“아무도 결국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 마소야는 무대를 박차고 뛰쳐나가려 했지만 발은 바닥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관객석 한켠에 수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수인은 그저 담담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안 돼… 날 봐줘…”
마소야의 절규는 허공에 흩어졌다.
그리고, 여섯 사람의 꿈은 하나의 공통된 순간으로 이어졌다.
검은 옷의 사내가 나타나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옷은 흰빛으로 번져나가며 창틀에 걸터앉은 잘생긴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제 내가 집에 갈 때가 됐다.”
그 목소리는 여섯 사람의 가슴 속을 동시에 울렸다.
순간, 그들은 각자의 처소에서 동시에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을 입은 새소리가 평화롭게 창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