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의 문 - 23화 (마지막화)

이제는

by 벙긋 웃는 문혜력

무주의 밤은 별이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새로 지은 공부방에서 나와 뒷산 능선으로 오르자 아이들이 먼저 환호성을 질렀다.

“쌤이 말했어요! 오늘은 북두가 숟가락처럼 보이는 날이래요!”

민이가 먼저 손가락으로 하늘을 그었다. 혜윤은 아이들 사이에 앉아 별자리를 이어 주었고, 수인은 뒤에서 돗자리를 펴며 아이들의 연필과 공책을 챙겼다. 지장준은 팔짱을 낀 채 어색하게 서 있다가, 아이들이 “저기도요, 저기도!”를 외치자 마침내 무릎을 꿇고 별을 같이 셌다. 마소야는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숲은 한 톤 더 어두워졌다. 반면 밤하늘의 별빛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그때였다. 아이들 넷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속삭였다.

“오셨다.”

어른들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 아주 느리게, 빛이 응결했다. 하얀 셔츠와 흰 캡, 창가에 걸터앉던 버릇 그대로의 실루엣. 혜윤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쿵 내려앉았다. 수인의 손끝이 저절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여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청년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얼굴은 전과 같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냉철한 표정이었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살아 있는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진짜 죽었었는지도 지금은 모두 잘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그는 먼저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별자리를 네가 먼저 찾아냈구나, 민이.”

“응! 쌤이 가르쳐준 대로.” 아이들이 환하게 웃었다.

여울의 시선이 혜윤에게 옮겨 붙었다. 그 순간 혜윤은 숨을 깊게 삼켰다. 그가 웃었다. 예전, 툇마루 끝에 앉아 슬리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웃던 그 표정.

“혜윤.”

그 한마디에 오래 묵은 것들이 흔들렸다. 혜윤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스스로를 인정하는 거니, 여울아?" 혜윤의 물음에 여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래전 이야기 하나만 하자. 내가 네게 슬그머니 건네던 과제 풀이, 체육대회 때 자리 바꿔 앉아준 일, 학원 버스 못 타고 울먹일 때 집까지 데려다주던 일들… 다, 내가 먼저 생각해 낸 친절 같았지?”

혜윤은 말이 막혔다. 고개를 젖히며 겨우 물었다.

“… 아니었어?”

여울이 수인을 향해 눈짓했다. 수인이 멋쩍게 웃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땐… 내가 너무 겁이 많아서. 네가 힘들어 보일 때마다 도와주고 싶었는데, 내가 앞에 나서면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래서 여울한테 부탁했어. ‘내 몫까지 옆에 있어 줘’라고. 그리고 네가 여울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어.”

혜윤의 눈이 커졌다. 오래된 퍼즐 조각들이 자리에 맞게 쿵쿵 끼워지는 소리가 났다. 여울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혜윤, 넌 그때부터 줄곧 수인을 좋아했어. 다만 그 마음이 내 얼굴을 통해서 건너 다녔을 뿐. 넌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수인의 볼끝이 달아올랐다. 그는 어깨를 한번 크게 들이쉬고, 허리를 굽혀 말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때의 소심함을 사과할게. 그리고 여울, 고맙다.”

“이제 알았으니까 됐어.” 혜윤이 짝사랑으로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약간은 허무하게 웃었다.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매듭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헐떡이는 숨, 바스락거리는 잡목. 전청과 동현이었다. 동현이 먼저 여울을 끌어안았다.

“야… 진짜 너냐? 보고 싶었다.”

전청도 덤비듯 껴안으며 목을 떨었다. “네 마지막을…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해서 미안하다. 김 여사님 걱정은 우리한테 맡기라고, 이 바보야.”

여울은 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때의 장면에 너희를 묶어두고 싶지 않아. 우린 이미 한 계절을 여러 번 지난 사이야.”

그는 모두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한 가지만 부탁한다. 너희를 괴롭히는 상황과 사람들을 너무 커다란 존재로 인정하지 마.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만 충실히 사는 것 때문에 너희 자신을 갉아먹는 일, 이제 그만했으면 해. 그 일은 그들에게 주는 선물도 아니고, 너희 스스로에게는 인생을 피폐하게 하는 손실일 뿐이야. 마음속 서랍 맨 아래칸, 덜 중요한 곳으로 어둠을 내려보내는 연습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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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자 숲바람이 한 번 부풀었다가 잦아들었다. 지상준이 그제야 입을 떼었다. 낮게, 그러나 선명하게.

“저 녀석… 지난번 죽은, 우리 과 여울 맞아?”

누구에게 묻는 건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눈을 찡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자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천사네. 딱 천사.”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옆에서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쌤의 친구들 이래! 수인쌤, 혜윤쌤, 동현쌤, 전청쌤! 우리, 다 같이 자주 만나면 안 돼요? 별도 보고, 책도 읽고!”

어른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전청이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오케이. 다만 숙제는 각자 해오고.”

아이들이 웃음으로 들끓었다.

마소야는 산등성이의 은빛에 잠시 눈이 멎었다가, 곧 여울과 수인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혜윤을 향한 질투가 미세한 흰 거품처럼 올라왔다. 지장준은 그 표정을 보고 드물게 입술을 굳혔다.

여울이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이들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지장준을 소개했다.

“얘들아, 앞으로 너희들의 쌤이 되어줄 분들이다. 좋은 쌤이 되어줄 거야.”

“에에? 쌤이 떠나면 서운해요.” 서이가 입술을 내밀었다. 여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떠나는 게 아니야.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뿐. 대신, 이 분들이 너희 곁에 더 오래 있을 거야. 저기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보며 쌤을 생각해 주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지장준의 팔과 허리에 매달렸다. “알겠어요! 우리 쌤이다! 우리 쌤!” 지장준이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처음 받아보는 환영이었다. 지장준의 눈가가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허둥거렸다.

“야… 뭐가 들어갔나. 무겁다, 너희들.”

그 옆에서 마소야는 여울과 수인 사이를 번갈아 훑었다. “둘 다 잘생겼네. 나, 둘 다랑 친하게 지낼 거야. 장준, 알아둬.”

질투와 소유욕이 섞인 목소리였다. 여울이 한 걸음 다가섰다. 마소야가 곧장 눈을 빛내며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 순간, 여울은 그녀의 이마에 검지를 톡 대었다.

“너는 ‘극복’보다 직접적인 치료가 필요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너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다칠 순 없지. 먼저, 사람부터 돼.”

말은 부드러웠지만 결은 단단했다. 마소야가 “뭐… 뭐야, 기분 이상해”라고 중얼거렸다. 여전히 장준에게 투정 부리듯 짜증을 냈지만, 그 눈빛에서 탐심의 날카로움이 빠져 있었다. 꼭 오래 열어둔 창문을 닫아 바람을 막아낸 것처럼, 그녀에게 담백함이 남았다.

여울은 마지막으로 모두를 보았다. “이제, 자주 만나자. 공부방에서든, 툇마루에서든, 별 아래에서든. 난 어디에든 있을 수 있거든. 난 죽은 적이 없고 너희들에게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있던 곳으로 가는 것뿐. ” 말끝에 그의 얼굴에 정돈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서 하얀 깃털을 하나 들어 올려 입으로 후하고 불어 깃털을 날렸다.

그는 아이들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고, 수인과 혜윤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현과 전청에게는 장난기 어린 눈빛을 한 번 던졌다. "원고는 너희 몫이야!" 여울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씩 웃었다.

빛은 왔던 길로 희미해졌다.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흔들었고, 스무 살, 스물두 살 어른들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밤하늘의 소리만이 돌아왔다. 물소리, 풀벌레, 아이들의 낮은 숨.

전청이 먼저 장난을 되찾았다. “아, 지장준 쌤. 울면 안 멋있어요?”

지장준이 헛기침을 했다. “감기 들었어. 밤공기 때문에.”

“쌤— 우리 내일부터 진짜 수업해요?” 나래가 눈을 반짝였다.

수인이 웃었다. “그럼. 별자리로 시작할까, 무엇으로 시작할까?”

“쌤 마음속 여행!” 아이들이 합창했다.

혜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북두가 숟가락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조용히 수인의 손등을 눌렀다. 손과 손이 잠깐 겹치고, 곧 자연스레 풀렸다. 무주의 밤은 여전히 깊었지만, 공부방으로 향하는 마음들 속엔 잔잔한 기쁨이 차 올랐다.

내려오는 길, 마소야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나… 내일은 아이들 간식이나 굽고 있을까.”

지장준이 멈칫,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전엔 듣지 못했던 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앞에서 “쌤— 빨리요!”를 외쳤다. 누군가는 천천히, 누군가는 성큼성큼, 모두가 한 방향으로 내려갔다.

뒤끝에 남은 바람이 툭, 등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같은 걸 떠올리고 있었다. 이 밤 이후로, 우린 조금씩 달라질 거야.

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