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지장준의 아이디어로 며칠새 마을중앙 소나무 옆에는 조립식 공부방이 뚝딱 세워졌다. "아따, 요즘 세상 좋아져불었구먼! 이렇게 멋들어진 공부방이 순식간에 생겨 버리고 말여." 황영감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우리 아그들은 우리 집에 그만 오는가? 나는 왠지 저 리조트 도련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안 생기네?" 황영감의 말에 아이들이 영감의 팔과 다리에 감겨왔다. "할아버지도 매일 여기 오셔서 우리랑 같이 계시면 되잖아요. 같이 간식도 먹고 낮잠도 자고. 그리고 여기 있는 게 질릴 때면 또 같이 우리의 툇마루로 가면 되죠, 뭐가 문제예요?" "맞아, 맞아. 난 할아버지네 마루에 누워서 하늘 보는 게 참 좋더라." 아이들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진 황영감은 어깨에 힘을 주며 슬그머니 웃었다. "그랴?" 그때 지장준이 그들 곁으로 와 황영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으응, 어서 와요. 여기서 무슨 모임이 있다고 그랬지?" '이 그 망나니 리조트 도령이 아그들 공부방을 만들지를 않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 않나, 뭐 잘 못 먹은겨?' "자, 그럼 내는 들어가 볼랑께. 아그들은 일찍이 보내들 주드라고. 부탁하요, 잉?" 황영감은 지장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하품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의 맞은편에서 혜윤이 인사를 하며 마주오고 있었다. 지장준은 혜윤을 보자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이, 혜윤. 나 만나러 일찍 왔어? 얘들아, 나하고 이 언니하고 잘 어울리지 않니?" 혜윤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자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아니요! 전혀요!" "수인쌤과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언니, 양다리예요? 이 아저씨랑?"
"아니, 너희들 그런 말을 누가 가르쳐 주었니?"
"아니, 우리 다 컸어요. 그런 말도 모르면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요?"
혜윤이 아이들의 말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고 지장준은 아이들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특유의 허세를 잃지 않았다.
“야, 이 녀석들. 농담이 뭔지 몰라서 그래. 난 그냥 혜윤 쌤이랑… 음, 팀워크를 맞춰보자는 뜻이지.”
“거짓말이다! 아저씨 얼굴 빨개졌다!”
결이가 소리치며 까르르 웃자,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혜윤은 난처한 듯 손사래를 쳤다.
“얘들아, 그만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러면서 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수인을 찾고 있었다. 문득 창문 너머, 새로 지어진 공부방 안에서 책을 정리하는 수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 와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걸까? 한풀 꺾인 햇살을 받아 윤곽이 선명하게 빛나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더 듬직해 보였다. 혜윤은 그의 존재를 확인하자 어질러져있던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그때, 지장준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야, 그래도 너희들, 나보다 수인이 더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에!”
아이들은 주저 없이 외쳤다.
지장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푸념했다.
“에이, 배신자들 같으니라고. 내가 너희 공부방까지 지어줬는데?”
그러자 민이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아저씨, 공부방 지어준 건 고마운데요…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죠.”
"그건 맞다. 혜윤쌤은 나랑 사귀어. 혜윤쌤, 입장을 확실히 하셔야죠. 저분입니까, 저입니까?"
수인의 말에 갑자기 모두 혜윤의 입술에 주목하였다.
"저는 여울..."
"여울은 또 뭐야?" 지장준이 슬쩍 신경질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
"앗! 우리 쌤을 아세요? 우리 쌤 이름이 여울이에요!"
"뭐?"
수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혜윤은 오히려 침착하게 말을 또박또박 이어갔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고백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데, 나는 짝사랑하던 사람이 있었거든? 그의 이름이 여울이었어."
두 남자의 긴장된 얼굴을 보면서도 꿋꿋이 혜윤은 말을 이어나갔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짝사랑을 마음에서 자유롭게 놓아주었어. 나는 수인쌤을 좋아해. 너희들이 말하는 양다리 아니야. 여기 지장준 쌤도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아이들이 동시에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수인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밝아졌다. 당장에라도 혜윤을 포옹하고 싶었지만 그녀 대신에 아이들을 번갈아 안아 들었다.
"들었지, 얘들아? 들었지?"
"켁, 숨 막혀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지장준은 수인이 부러웠다. 사실 약혼녀인 마소야와 자신은 서로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후에 정약결혼이라는 것만 해치우고 나서는 각자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기로 한 사이였으니,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분명하게 ‘우리’라는 이름을 가진 관계였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기꺼이 선택하는 모습이 내심 부러웠던 것이다.
"왜 우리쌤은 아직도 안 오시는 거지?"
아이들은 갑자기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들의 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수인은 혜윤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여름이었지만 크고 따뜻한 그의 손의 온기가 혜윤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다. 수인과 혜윤은 각각 동현과 전청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지은 공부방으로 오라고 재촉을 하였다. 그 사이 지장준은 마소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갈 건데 왜 전화야? 수인이 왔어?"
"우리도 이제 좀 다르게 살아 보자."
"뭔 소리야? 앞뒤없이. 수인이 왔냐고?"
마소야가 쌀쌀맞게 물었다.
지장준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그냥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