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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드북

[책] ‘위대한 개츠비’(1925)

4번 읽고서야 위대함을 알았다

by 스투키


<위대한 개츠비>를 어린 시절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 뭔 개소리야!’라는 마음속 외침도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랑이란 걸 경험했습니다.

한배를 탄 이별도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가슴이 저미었습니다.

눈물도 흘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시간은 흘러갔고,

감정은 많은 지분을 이성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책을 읽었을 때, 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런 감정을 글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머릿속을 맴도는 이 답답함은 닉이 개츠비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 그 느낌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 번 더 읽어 내려갔습니다.

비로소, 격정적인 감정들은 가라앉고, 차분하지만 긴 여운이 미소와 함께 스며들었습니다.

삶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세상과 인간에게 모순이란 것이 디폴트값을 넘어선 필연(必然)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체감하게 됩니다.

위선은 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 스며든 도덕적 딜레마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마치 자신을 개츠비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보이게 해 줄 것만 같습니다.

고작 사랑할 가치도 없는 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과 맞바꾼 개츠비의 사랑을 비웃는 것이, 자신을 좀 더 시크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두려움과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그 모든 도덕적 우월감과 비웃음은 내가 가지지 못한 개츠비의 의지를 깎아내리고픈 욕망의 발톱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품었던 꿈과 사랑은 그저 1920년대의 불법이 만들어 낸 기이한 묘사일 뿐이라고 갈겨쓸 때 오는 쾌감은, 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전 그저 개츠비의 파티에 참여해 즐기면서도, 칵테일에 취해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불청객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로 읽었을 때, 나는 요정의 날개 위에 주춧돌을 안전하게 세울 수 있다는 개츠비의 부패하지 않은 꿈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를 저 또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 머틀 윌슨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톰 뷰캐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질 필요도 없이 그들 모두는 그저 인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행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행동을 초월한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너무나 낭만적이었고, 전 그것에 감격했습니다.

마치 나에게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그게 뭐였는지도 까먹었을 때, 가구를 옮기다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많은 비평들은 그저 지식에 관한 것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책을 읽고 느끼는 낭만에 비하면 그저 지적 허영의 도구처럼 보였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이 책의 감정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책이 시대를 초월해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이라고 하면서도, 개츠비가 품었던 커다란 사랑과 환상을 시대에 가두려는 시도처럼 느껴집니다.

이 책을 네 번째 읽었을 때, 전 비평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전 마침내 시대적 한계와 도덕적 딜레마를 초월해 개츠비의 거대한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만일 제 노트북에 ‘시대적 환상과 사랑’이라는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10년 단위로 정의를 분류해 놓았다면, 거기에는 매번 한 음절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말을 써넣었을 것입니다.

과거를 되돌리려던 개츠비의 헌신과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전 그가 분명히 과거를 되돌려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닉의 집에서 데이지와 재회의 순간에 느꼈던 떨리는 설렘과, 다시 나누었던 사랑들은 분명 그가 5년 전 가졌던 감정 이상의 것들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인내했던 시간에 비해 너무 짧았지만, 그래서 더 강렬했습니다.

그 찰나의 교차는 시간을 거슬러 도달한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개츠비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다만, 그 현실이 지나치게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 부조리한 세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개츠비가 손을 뻗어 그토록 잡으려 했던 초록 불빛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의 야망은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츠비의 꿈과 환상은, 사랑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그 불빛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탐욕으로 변질된 빨간 불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성공을 위한 동기부여 운동들은 모두 <위대한 개츠비>가 남긴 변질된 파편일지도 모릅니다.

톰, 조던, 데이지, 머틀, 윌슨.

그들 또한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삶을 감당해 낸 인간의 초상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모두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도 저 중 누군가와는 분명 조금쯤 교집합을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 선택들 너머에는 탐욕이나 악의보다,

사랑받고 싶고, 버티고 싶고,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갈망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만일 <위대한 개츠비>를 한 번 더 읽게 된다면, 그땐 더 천천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데이지의 언어들도 다시 곱씹어 보고 싶습니다.

그녀가 개츠비의 아름다운 셔츠들에 감격할 때 흘린 눈물의 깊이를 더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던 베이커의 냉소 뒤에 감춰진 작은 진심을 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머틀의 교만 속에는 데이지 못지않은 사랑스러움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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